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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Oct 16. 2021

성장영화 <브루클린>을 보고

 왠지 이 영화가 이렇게 보고 싶더라니. 가을에 보기 딱 좋은 영화이다. 요즘은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느껴진다. 내내 쓰고 있어야 되는 마스크,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나는 꼭 영화관에 가면 속삭이는 사람들, 고개를 스크린 쪽으로 한껏 숙여서 스크린을 가리는 사람들,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부채질을 하는 사람들 등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혼자 집에 있는 휴일 오전이면 지금 내게 꼭 필요한 영화를 엄선해서 본다. 어제는 <트루먼 쇼>였고, 오늘은 <브루클린>이었다.





 내가 배우 시얼샤 로넌을 얼마나 애정하는지 잊고 있었다. <브루클린> 직전의 영화로는 <작은 아씨들>이 있었는데, 그때는 플로렌스 퓨에게 온 주의를 빼앗겨버렸었기 때문이다. 마법같은 그의 힘과 존재감에 놀라서 마음을 다 그에게 퍼부느라 바빴다. 반면 <브루클린>은 시얼샤 로넌이 시작이자 끝이고, 모든 것이므로 이지적인 그의 눈빛을 보는 두 시간이 그저 즐거웠다. 나와 닮아 있어서 답답하고 속이 타던 영화 초반부의 에일리스부터 어느새 어엿한 성인이 되어 어떤 곤혹스러운 상황에서도 똑 부러지게 처신할 줄 아는, 자기 중심이 잡힌 후반부의 에일리스까지, 그는 마음 둘 데 없던 아이리쉬 소녀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되는지 보여준다.





 요약하자면 <브루클린>은 아일랜드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살던 에일리스가 언니의 주선으로 미국 브루클린으로 건너와서 성장―'적응'이라는 표현은 충분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하는 내용의 영화이다. 성장기를 지나온 성인이라면, 혹은 어떤 나이에서든 낯선 타지에 불시착해서 어떻게든 발 붙이고 적응하려고 고군분투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미성숙했기에 괜찮은 척과 모두 알고 있는 척, 그 속에 속한 척을 해야 했던 부끄웠던 과거의 나를 보다 사랑스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어렸던 그때만 가질 수 있는 어설픔이 내가 지금 딛고 선 이 땅을 단단하게 다지는 기반이 되었다고 내 기억을 재구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내게 꼭 필요했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온통 에일리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찬 토니의 눈동자와, 초롱초롱 명민한 빛을 잃지 않는 에일리스의 눈동자가 서로를 담은 샷이 마음에 들었다. 이들은 선량한 마음과 타인에 대한 배려심 외에도, 무엇보다 미래를 꿈꾸는 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욱 닮았다. 그런 눈이 앞으로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일 년 전에 이 영화를 봤더라면 왜 다시 찾은 고향에서건 브루클린에 마음과 몸이 정착하는 과정에서건 남자들이 나타나는 거냐고, 오롯이 그만의 이야기, 그가 자신의 두 발로 꼿꼿이 서게 되는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었냐고 불평했을 것 같다. 나는 언제나 사랑을 꿈꾸는 사람이었는데도 그렇다.





 그러나, 사람과 삶은 사랑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이며, 그런 삶은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 그리고 사람이 생의 어떤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데는 남자, 여자, 혹은 사람이 아닌 어떤 존재에 대한 깊은 애정이 얼마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지, 그 감정이 어떻게 삶을 뿌리까지 바꾸어놓는지 알게 된 지금은 토니가 있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만약에 두 명의 성에 차지 않는 남성이 영화에서 꽤 중요한 것처럼 등장하는 것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신 이렇게 말을 건네고 싶다. 사랑을 하고, 선택을 하는 주체는 언제나 에일리스이며, 대상은 그 남자가 아니라 무엇이어도 상관 없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 애정의 대상을 실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영화적 표현으로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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