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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Oct 28. 2021

경험한 후에야 이해되는 책에 관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기로 약속하면서 보증서를 써달라는 건 파렴치한 일이야. 왜냐하면 너 자신에게도 요구할 수 없는 일이니까. 사랑이란 일종의 모험이야. 그 모험을 감수하겠다고 작정하는 거지. 진정한 사랑은 용기 있는 사람들의 것이란 말도 그래서 나온 거야.

― <아침의 첫 햇살>, 파비오 볼로 지음




 며칠 전 완독하고 감상까지 남겼던 <아침의 첫 햇살>을, 나는 이제야 이해한다. 분명 아직도 다 이해하지 못한 면면들이 있을 것이다. 내 남은 생애―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그 시간들―를 통해 직접 살아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 




 그러나 며칠 전, 가슴은 불타는 것 같고 주위에서 무슨 말을 해도 하나도 귀에 안 들리던 시기, 뻔히 눈에 보이는, 아니라는 수많은 증거들을 모조리 무시하고는 오로지 내 입맛에 맞고 내가 보고 싶은 사실들만 취사선택해서 멋대로 현실을 재구성해버리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온 정신이 다 사로잡혔으니. 내가 사랑에 빠지면 얼마나 머저리가 될 수 있는지도 철저히 알았다. 아니야, 너는 몰라. 왜냐하면 그를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그 눈빛을 본 적이 없으니까, 내가 아니니까, 우리의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거라고 현명한 조언을 일축하면서.





내가 <아침의 첫 햇살>을 읽는 내내, 그리고 다 읽고 덮고 감상까지 글로 남길 때까지 답답하고 화까지 났던 부분이 있다. 주인공 엘레나가 굳이 찾아오지 말라는 '그'를 만나겠다고, 절친한 친구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멀리 떠나있으며, 바쁘다고까지 말한 '그'를 찾아가서 그 관계에 종지부가 찍히는 장면.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엘레나는 불현듯 그 과정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불현듯 깨닫는다. 난 이걸 깨닫지 못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남자는 분명 게임을 즐기고 있을 뿐임을, 더 깊은 관계로 진전할 의향이 조금도 없음을 눈만 뜬다면 알 수가 있을텐데, 자존심을 다 버리고 차장가서 그런 쪽팔림을 무릅써야만 했던 건지, 그 수치스러운 과정이 꼭 필요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제는 알겠다.




 엘레나는 처음으로, 자신이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관계에서의 애정, 신뢰, 예의같은 것을 요구하기 위해 목소리를 낸 것이다. 늘 주저하고 고민하고 마음으로 삭이다가,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 이후에 남편 파올로에게도 오래 참아왔던 화를 폭발하고 이혼을 요구한다. 이후에 그에게 잘 맞는, 자연스럽고도 있는 그대로의 편안함을 안겨주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데,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엘레나는 자기 자신과의 로맨스에 빠졌으므로. 그는 자신이 받아 마땅할 애정, 맺어야 마땅한 관계 속에서 편안하게 숨쉬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내게 충분한 깊이가 없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스쳐지나갔던 책, 영화,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어서 흘려보낸 것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내가 준비가 되고 알아볼 눈이 생긴다면 적절한 시기에 나를 다시 찾을 것이다. 




 실은 지금도, 내가 어느 시점에서 뭘 잘못했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아닌지 조금은 나를 자책하고, 내 언행을 샅샅히 뜯어보고 있다.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하고. 내가 더 주저하지 않았으면, 아니면 더 마음을 일찍 정했더라면. 그 깊은 감정의 여운에서 완전히 벗어나기에 아직은 좀 이른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는 꽤 빠르게 내 일상에 다시 안착했고, 홀로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 순간을 더없이 감사히 여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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