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은 Oct 31. 2021

내면의 풍경을 바꿔주는 일

왕숙천을 걸으며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

 오늘은 오전에 시간이 조금 떠서 왕숙천을 한참 걸었다. 평소 매일같이 가던 인창 공원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동해 살 때도 그랬지만 사람이 참 왜 그런지, 코 앞에 있는 명소는 정작 잘 안 가게 된다. 실은 오늘도 가을을 맞이하여 작년부터 고대하던 석파정에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다른 일정이 끼어드는 바람에 왕숙천으로 방향을 튼 것이었다. 멀리 갈 필요가 없다는 엄마 말에 도대체 얼만큼 멋진가 싶어서. 그리고, 늘 그렇듯 엄마 말이 맞았다. 





 날이 이렇게 좋은데, 단풍에 갈대에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강변이 꽤 한적했다. 자전거 타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서울만 피해도 수많은 인파를 함께 피해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아는데도 가끔은 꼭 서울 나들이를 해야 한다니까. 나는 자연만을 감상하며 거니는 건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이 가을 풍경이 내게 큰 위안과 즐거움이 되어서 한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물론, 자연의 소리에도 귀 기울였다면 좋겠지만 나는 이어폰 없이는 집 밖에서 한 걸음 가는 것도 어려운 사람이라.





 오늘의 내 산책로를 함께해준 건 귀로 듣는 잡지인 김혜리 기자님의 오디오 매거진 속 최은영 작가님과의 인터뷰였다. 부제는 "장편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언제나 있었어요." 나도 언제나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 그것도 장편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부제에 마음이 확 끌렸다. 쓰고 싶은 욕망은 어디서 오는지, 참 이상한 일이야. 허구인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굴려보고,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내어 그의 역경과 고난을 온 몸으로 함께 겪고…. 욕망이란 참 이상하다. 평소에 아주 작게 타오르던 그 작은 불이, 쓰고 싶어하는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마치 산불이 일듯 기세 좋게 훨훨 타오르니 말이다.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다니게 되고, 함께 어떤 일을 도모하게 되고, 그때 편안함 내지는 소속감처럼 생기는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은 이것 때문일까. 본능적으로 내 안의 불을 이 사람이 지펴줄 것임을 알기 때문에.






 가을의 정취를 만끽해야 할 이 때에, 늦기 전에 동구릉도 가봐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 동네의 아름다움을 톡톡히 누렸다. 여행을 다니고, 새로운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사람이 마음의 안정과 행복감을 위해서는 거주하는 동네의 매력을 알아가는 시간, 정을 붙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특히 왕숙천의 남양주 쪽 길은 운동 기구도 대부분 설치한지 얼마 안 된 것들이었고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쓴 티가 났다. 구리 쪽 길보다 남양주 쪽 길이 더 잘 정비되어있기는 하지만, 하천과 길이 꽤 떨어져있어서 흐르는 물줄기 ―흐르는 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에 무언가가 해소되는 느낌이 든다―를 잘 볼 수 없다는 것이 단점. 나는 처음 왕숙천으로 다다르자마자 돌로 만든 징검다리를 건너서 남양주 쪽으로 갔다가, 꽤 걸어간 뒤에 낮은 다리를 통해서 다시 구리 쪽으로 건너왔다. 





 가끔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혹은 문득 떠오른 궁금증 같은 것을 해결하느라 잠깐 휴대폰을 보다가, 시선을 왕숙천으로 돌리면 도도하게 앉아있는 두루미, 하천과 아주 가까이 날고 있는 커다란 날개의 멋진 새 등을 볼 수 있었다. 그래, 내게 필요한 것은 소소한 일상 속 특별한 이벤트도, 내 하루를 밝혀줄 새로운 사람도 아닌, 그저 적절한 때에 적절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을 괴롭히는 하나의 문제에 너무 몰입해있다보면,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간, 이 세상에 나를 순식간에 즐겁게 해줄 멋진 일들이 아주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잊기가 너무 쉬우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가로등 아래 단풍이 반짝반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