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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Nov 05. 2021

귀로 잡지를 듣는 즐거움

요즘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 - 12. 오디오 매거진 <조용한 생활>

 요즘은 드라마도 노래 듣는 것도 그다지 재미가 없다. 하늘 높고 산책하기 딱 좋은 가을날, 나와 함께 해주는 것은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김혜리 기자님이 진행하시는 오디오 잡지, <조용한 생활>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스트레칭하고 출근할 준비를 할 때, 걸어서 30분 걸리는 출퇴근길, 운동을 하러 공원에 다녀오는 길 등등에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 일상 전반에 김혜리 기자님의 목소리가 녹아들다니! 그것도 내가 좋아해마지 않는 사람들의 삶도 함께.





 처음 <조용한 생활>을 구독하기로 결정한 건, 김혜리 기자님이 책 소개를 해주시는 코너 때문이었다. 연재를 시작한 올해 2월부터 기자님이 소개한 책들은 <줄리안 반스의 사적인 미술 산책>부터 <만화의 이해>, <몸의 일기> 등 분야는 다양하지만 모두 내가 읽어보지 않았고, 읽을 예정도 없으나 충분한 흥미를 가지고 있는 책들이었다. 혜리 기자님이 소개해주시는 책은 늘 읽지는 않아도 흥미를 가지고 예의주시하게 되는데, 취향의 결이 비슷하기도 하지만 그가 전달하는 그 방식을 좋아하고 동경하기 때문이다.





 나는 기자님과 유머감각이 잘 맞는 것 같다. 이를테면, 최근에 나이가 드는 것에 관하여 이슬아 작가님과 진행하신 방송에서, 이제는 흰 머리가 있으면 어서 뽑아달라고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라, 한 가닥 한 가닥 소중하게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는 걸 듣고 엄청 웃었다. 이 에피소드에 대해서 덧붙이자면, 나는 늘 눈 감았다가 뜨면 머리는 하얗게 세어있고, 직장은 이미 퇴직해서 놀러오는 손자, 손녀들에게―나의 자녀들에게는 퍽 너그럽기가 쉽지는 않으리라는 걸 이미 알아챈 것이다― 호박파이를 구워주는 너그러운 할머니가 되어있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인데, 나이드는 것의 미학과 더불어 현재의 순간, 그러니까 나이가 들어가는 이 모든 순간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새삼 깨달았다. 내가 칠칠맞지 못해서 잘 다치고 금방 낫는 것, 베갯자국이 뺨에 선명하다가도 출근할 때 되면 금방 사라지는 것, 이게 당연한 게 아니었구나, 내 남은 생애 내내 그렇지는 않겠구나, 하고.




 

 또 이탈리아 사람들 관련된 책을 추천하시면서 소개해주신, 이탈리아 시장들이 시민들에게 코로나-19로 인한 격리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고, 덕분에 한참을 웃었다. 길을 걸으며 잡지를 듣다가 나 혼자 빵 터져서 웃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민망한 것도 모른 채 마음껏 웃는다. 누군가와 마음이 통해서 걱정 없이 웃을 수 있는 이런 순간이 아무때나 오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에.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창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함으로써 가능했던 힘을 이제는 오디오 잡지가 내게 불어넣어주는 것 같다. 이를테면, 지금은 류성희 미술감독님의 인터뷰를 듣고 있는데, 최근 평생 함께하고 싶은 두 가지 습관을 소개해주셨다. 하나는 5분 명상, 그리고 또 하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Five-minute Journal>이다. 두 습관 모두 딱 5분만 써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계속 하니까. 나도 개심의 계기가 되길 바라며 몇 해 전 산 <Five-minute Journal>을 갖고는 있는데, 역시나 며칠 안 적고 책꽂이에 잘 꽂아두었다. 그런데 감독님의 말을 듣자니, 나도 당장 내일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내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일상이 안정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건지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다니, 싶었다.






 내 시야를 넓혀주고, 그만큼 내 삶의 반경을 키워주는 일. 이런 놀라운 일을 오디오 매거진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하고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모임이 그리운 것은 사실이다. 신년맞이 인사를 하는 참에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얼굴 몇을 다시 보게 되길―. 실은 구독해놓고 듣는 코너만 듣고 있어서 아직 못 들은 에피소드가 엄청 많다. 다음주부터 갑자기 겨울 날씨가 되어 이제는 한없이 걷고 또 걸으면서 잡지를 듣는 즐거움은 어느 정도 포기할 각오를 하고 있다. 그래도 겨울만의 기쁨과 포근함이 있고, 나는 이번 겨울에만 누릴 수 있는 일상의 작은 기쁨들을 분명 찾아내고 말테니까. 바로 이 <조용한 생활>을 찾아냈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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