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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Nov 07. 2021

가을날의 동구릉, 그리고 파랑새

결국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여행에 대하여

여행자는 자신의 집에 이르기 위해 모든 낯선 문마다 두드려야 하고,

마침내 가장 깊은 성소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바깥세상을 헤매 다녀야 합니다.


― <기탄잘리>,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지음




 오늘은 동구릉에 다녀왔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데 잘 안 가게 되는 건, 동구릉까지 가는 도보가 너무 큰 도로 옆에 나있는 것도 있지만, 말 그대로 가까워서이기도 하다. 언제든 무리 없이 갈 수 있는 곳은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기 마련이니까. 




 내가 기억하는 한 올해 두 번째로 찾은 동구릉은 이미 단풍이 거의 다 떨어져있었다. 그 덕에 동구릉에 가는 길에도 노란 은행잎이 날 위해 준비된 양탄자마냥 깔려있어서 영 기분이 좋긴 했으나 더 늦기 전에, 단풍이 초절정에 이르렀을 때 왔으면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까 생각했고, 내년에는 계절에 한 번씩은 꼭 들르기로 결심했다. 함박눈으로 뒤덮인 동구릉은 얼마나 고요하고 더 아름다울까, 봄이 막 찾아든 동구릉은, 여름이 되어 살아움직이는 듯한 푸른 동구릉은. 그 모든 모습이 궁금해졌다. 작년 딱 이 맘 때쯤에는 가을날의 석파정을 때에 맞게 보겠다고 마음을 다졌었는데, 올해는 그 대상이 동구릉이 됐다. 




 어쩌다 한 번씩 가게 되면,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이 곳을 더 자주 찾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오늘은 오전에 운전연수를 받고 심하게 멀미가 나서 좀 가라앉히려고, 또 오후에 어디 먼 곳을 찾아가기엔 시간상 무리가 있는데다가 지금 동구릉에서 스탬프 투어를 진행하기 때문이었다. 어플 워크온을 설치하고 스탬프 7개 이상을 찍으면 소정의 상품권에 응모할 수 있는데, 행사와 겸해서 입장료도 안 받고 있어서 이번 기회에 가을 동구릉 나들이를 나선 것이었다.




 동구릉에 가면 하늘을 많이 올려다보게 된다. 근처에 큰 건물이 하나도 없으니 눈에 걸리는 것은 산과 나무뿐이라 그 경치를 보고 있자면 마음을 이상하게 편안해진다. 또 동구릉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바로 오늘 내 멀미를 상당부분 가라앉혀주었던 것, 바로 바로 입구부터 확 날 반기는 숲 내음이다. 내가 사랑해서 동구릉보다 다섯 배는 자주 찾는 선릉에서도 맡을 수 없는 향취가 있어서 마스크 안에서 열심히 호흡했다. 내 안에 이 향이 더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엄마아빠를 따라서 워낙 자연스럽게 산에 갔기 때문에, 자연을 찾는 게 얼마나 내 몸과 마음의 건강에 유익한지, 내가 자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이제는 의식적으로, 너무 도시에만 젖어있지 않도록 찾아가야만 하고, 또 도시 속 스며든 자연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파랑새>에 대해서 생각한다. 파랑새를 찾기 위해 멀고 먼 여정을 떠났다가 집에 들어와, 실은 파랑새가 집에 있었다는 걸 깨닫는 안데르센의 동화에 대하여. 예전에는 이 무슨 시간 낭비인가,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걸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여기곤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야, 파랑새가 집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그 여정은 꼭 필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과 같다. 나는 서촌을 아주 좋아하는데, 이어폰을 끼고 천천히 걸으면서 높이 높이 뻗어 올라간 은행나무를 보고 있자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기 때문이다. 그 동네는 기운이 남다른 것처럼 내게 느껴진다. 적어도 나와는 잘 맞는다고. 그런데 어느날 출근길에 그에 못지 않게 길고 높게 솟은 은행나무들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귀신을 본 듯이 깜짝 놀랐다. 아니야, 이럴 리 없다고.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걸 지척에 두고는 보지 못했을 리 없다고 부정까지 하고 싶은 기분. 나는 뭘 위해 그렇게 멀리까지 갔던가 생각했으나… 그런 건 또 아니었다. 귀한 것을 알아보는 눈이 그제야 생기는 것도 물론 있거니와, 내게 가진, 혹은 나와 가까운 귀한 것의 존재 자체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도 있기 때문에.





 전자는 보석을 매일 보면서도 얼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몰랐던 상태라면, 후자는 아예 보석이 있었다는 걸 인지조차 못하는 단계라고 할까. 결국은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이고, 우리는 알기 위해서 멀리 떠나야 하므로. 그러니까, 나는 이제야 여행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매일 집으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여행이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내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이듯이. 돌아올 때 무엇을 깨닫고, 손에 쥐고 돌아오든, 집에 돌아온 뒤에 다시 발견하는 내 자신은 그 이전과는 또 다른 모습의 사람일 것이다.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사랑스러워서 낯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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