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나를 휩쓸었던 감정의 파도에 대하여
나는 늘 모든 일은 의미가 있으므로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에 이미 대부분은 흘러가버린 감정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고 싶었고, 또 지금의 감정이 흘러가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쩌면 올해도 되지 않아서 전혀 남의 일처럼 생각하게 되겠지. 내가 남긴 기록을 읽으며, 내가 이런 마음이었던 때가 정말 있었단 말이야, 하고 놀랄 수도 있다. (실은 지난 일기들 보고 이미 놀란 참이다.)
1. 살고 싶어진 것
사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나는 마음에 큰 둑을 쌓아놓고 아무에게도 쉽게 흘려보내지 않았는데, 그 둑이 아주 오랜만에 터진 것이었다. 그래서 내내 심장이 둥둥 떠있는 것 같았고, 이 적응되지 않는 심장의 속도와 보조를 맞추려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뛰고, 움직이고 행동하고, 그에 따라 조금씩 변해갔다. 기꺼이 홀로 있는 평안함을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내 삶에 들일 준비가 된 사람으로. 누군가와 삶을 함께 한다는 것, 보조를 맞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요즘 빠져있는 <조용한 생활>에서 부록으로 다뤘던 동거의 기술 편에서 김하나 작가님이 말씀하셨다. 누군가와 함께 살려면, "요철"이라는 것이 맞아야 한다고.
나는 내게 이런 애정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 큰 성인 남자를 사랑스럽다고 느끼고, 그의 모든 행동을 마치 어린아이 시절부터 지켜본 어른처럼 대견하게, 또 안쓰럽게 여기게 될 줄이야. 그러나 소설 <아침의 첫 햇살>이 말하듯, 이 모든 애정은 그가 아닌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나도 미처 몰랐던 애정의 씨앗이 늘 내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씨앗을 발견하게 된 것, 그리고 내내 굳어있다가 이제야 겨울잠을 깬 사람처럼, 갑자기 삶으로 돌아온 것만 같다. 이제야 비로소 사는 것 같다.
2. 나보다 엄마를 신뢰하게 된 것
나는 엄마보다 내 눈을 훨씬 믿었었다. 엄마는 원체 순둥이라 누구든 좋게 본다고, 그래서 사람 보는 눈은 나보다 못하다고 늘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엄마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때 그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이성적이라고 자부했던 내가 완전히 무언가에 씌여있었다. 이제는 엄마에게, 무조건 엄마의 말을 전적으로 믿겠다고, 나의 판단 따위 순식간에 어리석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좋은 경험이었다.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이라고, 내 타고난 감각과 직관을 신뢰했건만, 내가 뻔히 눈에 보이는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고 싶어하고 듣고 싶어하는 것들로만 취사선택하여 현실을 재구성했다. 금방이라도 툭 쓰러질 것 같은 무대장치를 내 손으로 꾸민 것이기에, 나는 내내 불안하고 초조했고, 잠도 잘 못 이뤘으며, 때로는 갑자기 솟아오르는 화나 시기, 질투 따위를 제어 못했었다.
나는 이제 잠을 푹 잘 자고, 훨씬 편안해졌다. 예전같이 파도의 꼭대기에 오르는 그런 감정의 고조를 기대할 일은 없지만, 내내 단꿈을 꿀 수도 없게 되었지만, 안정이 찾아들었다고 할까. 그간 꽤나 좋은 족으로 변한 내 생활로 돌아오게 되어서 다행이다.
3. 아빠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 것
어렸을 때는 아빠같은 사람은 절대 안 만나겠다고, 그러느니 평생 혼자 살겠다고 수백번, 수천번을 말하고 속으로도 다짐했건만, 커서 보니 아빠만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뼛속까지 실감하게 된다. 그것도 매번.
일단 아빠는 선한 마음을 가진 성실한 사람이다. 술, 담배를 일절 안 하는 것과 꾸준히 운동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늘 성장하는 사람이라는 미덕이 그를 존경할 수밖에, 또 내가 그를 꼭 닮은 딸인 걸 감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다만, 아빠는 나와 '요철'이 맞는 사람은 분명 아닌 것 같다. 나와 너무 닮아있기 때문에. 또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내가 너무 그와 똑같이 자라났기 때문에. 이를테면, 감정 표현에 미숙한 것이나 결과 지향적인 것, 일상의 사소하면서 삶의 뼈대를 이루는 것의 가치를 잘 잊는 것. 그래서 나는 엄마랑 아주 잘 맞나보다. 사랑이 넘치고 표현에 인색하지 않으며 불안정한 나를 말 한마디로 가라앉혀주는 사람.
4. 나를 알아보는 사람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
사람의 진심을 그동안은 조금 가볍게 여겼던 것 같다. 괜히 기대했다가 나만 상처받을 테니까 저 유통기한 짧은 마음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애써 스스로 타일렀던 것도 있거니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 그게 얼마나 귀하고 흔하지 않은 일인지, 말 그대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는 걸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이제는 알겠다. 아는 게 보인다는 말처럼, 나와 닮은 영혼을 알아보는 '눈'을 모두가 가지고 있으며, 그 눈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 결코 쉽게 지나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나는 지나친 인연들을 더 소중하게 내 삶에 초대했어야 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 사람과 그의 마음을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