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저
내 기타의 이름은 기타로 할게요, 라고 내가 말하기 전에 미리 정해진 사실 같은 것은 없다. 그 사실에 비추어 저 문자의 참과 거짓을 따질 수 없다. 오직 저 말이 새로운 사실을 세상에 기입한다. 나의 발화와 더불어, 내 기타의 이름은 기타가 된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내가 말할 때도 어쩌면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어떤 발화들은 세계를 변화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말들이 물들인 세계로 손을 잡고 걸어 들어간다.
―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저
나는 사랑에 빠지면 잠을 못 자는구나. 뼛속까지 intj인 나는 시뮬레이션 돌릴 것이 너무 많아진다. 다른 발화의 가능성을, 다른 감정이었으면 내뱉었을 다른 발화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보면 잠을 자꾸 설친다. 잠이 얕아지므로 낮을 견디는 일이 더 힘겨워진다. 그러나 일상은 이미 내게서 빛을 잃었다. 어떤 것도 예전만큼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견우와 직녀가 비로소 이해된달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도 어쩌면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라는 문장을 보고 반가웠던 것은, 내가 늘 생각하던 사랑의 정의와 똑 닮은 생각을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사랑인지 모르고 하는 사랑, 미처 몰랐지만 사랑이었다는 것― 난 이런 감정을 익히 알고 부정할 수도 없지만, 사랑이 무엇이냐고 내게 물어본다면 의지로서 실현되며 발화로서 표현되어 상대에게 가닿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너무나 어려운데, 사랑을 가로막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단순하게 결론 짓겠다. 인간의 마음이 어리석고 영혼이 하는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결국 인생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사랑이 이토록 어렵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잊지 않는다면 더 쉬워질 것이다―"우리는 매일같이 죽어야 한다. 어제의 나는 죽고 오늘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계적인 마음으로 살게 되고, 기계적인 마음은 사랑을 모른다."는 문장을 김보라 감독님의 <조용한 생활> 인터뷰에서 건져올린 바 있다―. 이 순간뿐인 감정, 지금 한번뿐인 인연, 단 한번의 삶임을 기억한다면 더더욱.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는 고통에 무뎌져서 자꾸만 삶과 영혼을 흘려보낸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왜 사람 마음이 마음처럼 안 될까. 무 자르듯 내 마음을 마음대로 재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 이런 생각들을 반복해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장들 자체에 어폐가 있다. 마음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다니. 그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지금 내가 마주한 문제인데.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시나리오는 정해져 있다―이것이 유일한 문제인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거기에 부합되지 않는 관계, 사람, 감정은 모조리 자격 박탈이다. 내 삶에 들어올 수 없다고 선언했는데, 인생은 모든 계획을 비껴가기 마련이므로 어리석은 인간은 그 앞에서 잔뜩 당황하여 혼비백산할 뿐. 마치 예상 못했다는 듯이. 본인이 삶의 작가이고 감독인 줄 알았던 것처럼.
이렇게 쓰다보니 "삶이 우리에게 주려는 것이 우리가 스스로 얻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감명깊은 문장을 내게 안겨줬던 마이클 A. 싱어의 <될 일은 된다>라는 책이 떠오른다. 내려놓기가 삶의 유일하고도 가장 바람직한 해법임을 이해하고 내려놓기로 작정했으면서, 나는 삶의 고삐를 움켜쥔 채 놓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은 아무리 좋은 책을 읽고 좋은 말을 들어도 직접 체험으로서 겪어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걸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그것이 인생의 목적 아니겠는가, 행동하고 체험하여 비로소 아는 것. 사랑하고 싶다는 말을 돌려돌려 이렇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