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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Aug 15. 2020

과정일 뿐이라는 말

끝도 시작도 아닌 이곳의 이름은

 몬태나 주립대학에 교환학생으로 1년간 있었을 때의 일이다. 나는 당시 대학을 4년만에 졸업하는 게 목표였고, 그러려면 자유를 만끽하기에 앞서 전공수업을 게으르지 않게 들어야했으므로 미국에서 맞이한 첫 학기에 전공수업 4개를 포함하여 도합 19학점을 듣게 되었다.




 내가 예상치 못했던 것은 매주 쏟아질 엄청난 양의 과제였다. 단순 문제 풀이라면 한국에 비해 어렵지 않아서 문제가 안 되었지만, 매주 모든 전공과목에 대하여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으므로 자연히 Office Hour를 이용해서 교수님을 물고 늘어지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어쩔 때는 나 혼자 교수님을 한 시간이 넘도록 붙들고 있었는데, 내가 나갈 무렵에는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맙다는 진심어린 말을 듣고 감동의 도가니에 빠지기도 했다.





 하루는 중간고사가 끝난 후 성적이 발표된 직후의 OH 시간이었다. 나와 다른 중국인 학생이 교수님 사무실에 찾아갔다. 그 학생은 자신의 답변이 어디에서 잘못되어서 원하는 점수를 받을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 물어봤고, 교수님의 아주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내 질문한 거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학생이 아, 이제야 알았다고, 하지만 너무 늦었다고 말하는 순간 언제나 친절하고 미소를 잃지 않던 교수님은 진지하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공부하는 과정에 있어서 늦은 건 없다고.  






 당시 지루하게 기다리던 내게는 눈이 떠지는 한 마디였다. 그동안의 어떤 교수님들에게서도 보지 못했던 태도를 목격한 것이다. 





 한국의 학교에서 공부할 때에는 이 모든 게 평가받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었다. 10년이 넘게 제도권 교육을 받으면서 나는 내내 쫓기는 기분이었고, 어쩌다 한 번 삐끗하면 회복할 수 없게 될까봐 실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언제나 미리 정해져있는 "정답"을 맞추기 위해서 전전긍긍했다.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새로운 지식을 얻기보다는 내가 많이 하는 결국 시험장에 들어갔을 때 완벽히 준비가 되어있도록 지난한 연습을 했던 것 같고, 그런 게 나에게는 공부였다. 긴장감 넘치고 늘 숨이 막히는 것. 




 어른들의 말을 따라 자라면서 옆 길로 샌 적 없는 학생들이 사회에 나와서 가장 어려움울 겪는 것도 이런 점인 것 같다. 결국 인생의 행로는 본인이 만들어가는 것이고,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거칠 수밖에 없을텐데 어디에도 없는 정답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 




 결국은 기나긴 삶의 여정을 통과하는 중에 나는 그저 오늘 점 하나를 찍었을 뿐이라는 걸 받아들이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망쳐버린 시험으로 절망해있는 학생에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위로는 물론, "이번 시험 어려웠어"가 아닌 "나도 망했어" 겠지만, 그 다음 순위로 내가 들었던 이 말을 건네고 싶다. "과정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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