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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Jan 18. 2024

#5 그 자리에 있어주세요

 어쩌면 당신은 사랑을, 나는 당신을 원했습니다. 그 말은 곧 서로의 방향이 달랐다는 말이에요. 당신은 내가 아니더라도 사랑을 찾았을 테니까요. 우리의 끝은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난 사람과 남은 이의 이야기였지요. 지독한 허무함으로 온몸에 힘이 빠질 뿐 눈물도 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람이 흘러간 그 자리로 남은 공허함과 무기력함에 잠식되지 않으려 바삐 몸을 움직여야 했어요. 빈자리를 보면 그 아래로 떨어질까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몸과 마음이 여유로운 날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넉넉하고 그렇지 못한 날엔 작은 점마저 불편해져요. 모든 것이 힘들었던 어느 날 받은 연락 한 통에 묵직한 짐으로 남아 한동안 바쁘게 살아야 했어요. 작은 공간에도 불쑥 들어와 온 마음을 뒤집어놓고 갈까 무서웠거든요.  


 나를 담았던 그 눈동자와 온 사랑을 보여주던 표정은 이제 존재하지 않아요.

밥 한 끼를 먹이기 위해 장거리 운전을 마다하지 않던 수고와 애지중지 아껴주던 손길도, 모든 통화의 끝에 붙였던 사랑한다는 말은 가벼이 불어온 바람에 모두 흩어졌어요. 지난밤의 꿈처럼 조금씩 옅어진 사람. 어떤 이야기였는지 흐릿해져 가는 기억은 이내 느낌으로만 남을 뿐입니다.


 잘 지내냐는 말도 아픈 건 괜찮냐는 물음에도 아무 생각이 없어요. 종종 연락하자는 인사에도 형식적으로 넘길 만큼 말이에요. 사랑이 지나가고 남은 흔적은 베어진 나무 밑동처럼 남아있지요. 마음에 닿아 일렁이게 만들던 나뭇잎과 바람을 타고 흔들거리던 가지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요. 이제는 어느 글의 소재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대단치도 않은 감정이 몇 번 지나갔을 뿐인데 몸을 사리며 살게 되었어요. 성큼 가까워진 거리만큼 녹아든 그 사람은 자국이 되어 남아있더라고요. 물든 흔적을 지워내고 다시 나의 색을 칠해도 보이는 어떤 얼룩처럼 말이죠. 나는 그게 퍽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얼룩을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리저리 피해봐도 사람이 물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봐요. 혼자 사는 섬이 아니기에 많은 사람과 스치며 알록달록 해졌어요. 이제 보니 꽤 멋진 풍경이 되어있더군요.


 여전히 새로운 사람은 경계하며 가까워지기를 두려워하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손 흔들어줄 존재가 있다는 건 기쁜 일이에요. 급하지 않게 조금씩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다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주는 것만큼 돌려받기를 기대하던 눈과는 다르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며 기다려주는 고마운 존재. 감히 욕심내지 않고 오래도록 볼 수 있는 사이를 바랍니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곳에 있어주세요. 천천히 오래도록 함께 걸을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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