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하지 말아요, 아직 새벽 두 시니까.

저녁의 라디오 타임이 준 선물#1

유난히 힘든 하루였다.

언제나 해왔던 일은 마음처럼 풀리지 않았고 원래도 사이가 좋지 않던 후배는 평소보다도 부딪쳤다.

날씨는 무더웠고, 길을 오가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보기도 싫었다.


지긋지긋하다..



아침 출근길에서부터 저녁 퇴근길까지 어떤 마음으로 버텼는지, 아니 버틴 게 용하다 싶은 하루였다.



집으로 와서 샤워를 하고는, 건강을 생각한다며 끊기로 한 맥주를 꺼내 들었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캔 따는 소리라도 듣고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런데 경쾌하게 캔이 따지는데도,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벌컥벌컥 마셔보아도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다.

어라. 한 달 만에 마시는 맥주인데, 아니 이게 원래 이런 맛이었나?

그 부드럽던 목 넘김은 어디 가고. 탄성이 나오던 시원함은 어디 가고,

그저 알싸한 알코올 향만이 나를 반겨주었다.


말 그대로 입으로 마셨는지 코로 마셨는지도 모르게 맥주 한 캔을 마신 후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복잡한 마음에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았고, 점점 더 부정적인 생각들로 머릿속이 휘어잡힐 즈음,

켜두었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어떤 노래의 가사가 내 귀를 스쳐갔다.


걱정하지 말아요, 아직 새벽 두 시니까.

기억을 보내주시면 지금 잠으로 교환해 드려요

걱정하지 말아요, 새벽은 남았으니까.

...

잊어버리면 오늘은 잠들 수 있겠지만

오늘을 잃어버리면 무엇이 될 수 있나요

...

- 김사월, 교환 중



그 가사를 듣는 순간 부정적인 감정이 가라앉고 조금 진정이 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이 노래의 깊은 뜻까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노래가 이렇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 내일이 오려면 아직 새벽이 남았어.

이 새벽이 가기 전에 내 기분을 잘 정리하고 내일을 준비하면 돼.

그럼 잠도 잘 올 거야. "




기분을 정리해야겠다. 싶어 누운 채로, 오늘 하루를 돌아보았다.

사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그렇게 나쁜 하루도 아니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 언제나 술술 잘 풀리지만은 않는다.


오늘따라 좀 많이 부딪친 후배?

> 다른 날이라고 덜하진 않다. (더하면 더했지.)


무더운 날씨?

>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외 자잘한 문제들?

> 평소에도 있을법한 사소한 일들이었다.


맥주가 맛이 없다?

> 기분 탓이었을 테지만, 이걸 계기로 다시 금주를 하면 된다!


별 것 아닌 일들로 내가 나 스스로 내 기분을 나쁘게 하고 있던 거였다.

요즘의 나는 부정적이고, 모든 것에 쉽게 짜증이 나고 무기력했는데

그 모든 원인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나였다.

한번 부정적인 감정의 수레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괜한 것에 짜증이 나곤 한다. 요즘처럼 더운 날엔 조금 더.

의식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부정하려고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괜찮다.


만약 오늘 하루가 그랬다면,

내일이 오기 전에 싹 리셋시켜 버리고 훌훌 털어버리면 된다.

노래 가사처럼 아직 오늘의 새벽은 남아있다.

새벽동안 혹은 새벽이 오기 전에라도 확 털어버리고 푹 잔 다음, 내일 하루를 또 새롭게 살아가면 된다.

오늘 기분이 별로였던 만큼 내일은 더 끝내주는 하루가 될 수도 있다.


우연히 들은 노래 가사는 엉망진창이었던 하루의 마지막을 기분 좋게 마무리해 주었고

나는 훨씬 편해진 마음으로 잠에 들 수 있었다.



힘든 하루를 보낸 나에게,

아니 나와 같은 하루를 보냈을 모든 사람들에게

라디오가 보내준 선물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너는 보지 못할 너에게 보내는 편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