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보지 못 할 너에게 보내는 편지, #3

쏟아지는 감정을 멈출 수가 없어서요

Dear, 깊은 눈동자를 가진 G에게



안녕,

오늘도 바쁘게 일하고 있나요? 부디 아픈 곳 없이 건강히 지내고 있길 바라요.

이제는 남보다도 더 남이 되어버려 안부도 묻지 못하게 되었네요.

오랜 기간을 함께 한 것도 많은 추억을 서로 나눈 것도 아니어서 금방 괜찮아진 줄 알았어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 갑자기 왈칵, 많은 감정들이 쏟아져버렸고 수습이 안돼서 급히 편지를 써요.

이렇게라도 하면 정리가 좀 될까 해서요.




G, 별이 쏟아지던 밤하늘 아래서 나눴던 우리의 첫 대화를 기억하나요?

그날은 아침부터 참 이상한 날이었어요.

몇 가지 우연이 겹쳤고,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당신과 나의 만남이 시작되었죠.

어색하게 첫인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나눈 이야기는 처음 만난 것 같지 않게 이야기가 흘러가 10분 같은 2시간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가던 길, 당신은 내 생각을 하며 웃었다고 했죠.

사실은 나도 그랬어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집에 돌아와 우연히 거울을 봤는데 볼을 발갛게 하고는 웃고 있더라고요. 너무 오랜만에 보는 내 모습이 어색해 금방 정색했지만, 금세 또 웃음이 났어요.

아, 이거 위험한데.

순간 왜인지 설렘과 함께 두려움이 느껴졌어요. 그 감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오랜 시간, 저는 혼자로 지내왔고 그래서 혼자가 더 편했는데.

굳이 누군가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고, 이런 나는 누군가를 만날 수 조차 없을 거라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우연히 그렇게 당신을 만나버린 후에, 조금 생각이 바뀌었어요.


둘이 좋을 수 있구나. 둘도 좋은 거구나.

누군가를 마음에 들인다는 게, 무조건 나쁘지만은 않구나.

하루를 두근거리며 시작하고 끝낼 수 있다는 건 어떻게 보면 축복과도 같구나.


그렇게 좋은 걸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참 많이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 나를 데리고 가줬던 동네가 있었잖아요.

어떻게 보면 평범한 동네인데, 같이 갔던 그날은 유난히 더 거리가 반짝였어요.

떨어지는 나뭇잎과 불어오는 바람을 피해 당신의 외투 주머니 안에 손을 넣으면 몇 번이고 따뜻하게 잡아 주었던 것, 내 취향에 맞춰서 골목을 돌아주고, 내 속도에 맞춰서 걸어주었던 것 정말 고마워요.

그때 걸었던 돌담길의 나무 사이로 비추던 햇살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잠깐만 시간을 멈춰두고 감상하고 싶었던 게 기억나네요. 그 햇살에 비치던 당신의 옆모습도 너무 예뻐서, 조금만 더 보고 싶었거든요.


내가 좀 더 많이 먹었던 칼국수와 당신이 좀 더 많이 먹었던 국밥은 같은 계절 다시 가서 먹는대도 아마 그때만큼 맛있지 않을 거예요. 늦은 밤 대충 옷을 껴입고 뛰어나가 사 왔던 팥빙수의 달콤함도 다신 못 느끼겠죠.

그 맛을 기억해버려서, 저는 한동안 팥빙수를 보면 당신이 떠오를 것 같아요.

혹은, 가을에만 팥빙수를 먹게 되거나.




남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에게 해 줬던 밤,

내가 좀 더 당신 이야기를 잘 들어줬어야 했는데 좋은 말을 해주려고 고민하다가 제대로 듣지 않은 사람보다 못한 반응을 해버렸던 것,

나한테 해주는 것만 보고 믿으면 됐는데 그러지 못하고 조바심을 냈었던 것,

그러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어버린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가져버린 것,

정말, 미안해요. 미안했어요. 내가 참 많이 부족했어요.




그래도... 조금만 천천히 떠나지 그랬어요.

내가 해보고 싶다고 하면, 꼭 해보자고. 내가 가보고 싶다고 하면, 꼭 가보자고 했으면서.

당신이 나에게 보여주었던 새로운 세상처럼, 나도, 당신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직 못해준 말이, 같이 가고 싶었던 곳이 너무나 많은데.


자신은 사랑을 느껴본 적 없다고 했었죠.

슬픔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었죠. 손이 따뜻한 만큼 마음이 차가운 사람이라고 했었죠.

나는 워낙 많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라, 함께 지내면서 당신에게도 그런 감정을 전해주고 싶었어요.

높은 목표를 추구하며 달리는 사람인만큼 놓치기 쉬운 발 밑의 아름다움을, 하루하루의 소소한 행복을,

때로는 깊은 슬픔을, 때로는 묵직한 기쁨을 함께 느끼며 풍요로운 감정의 결을 나누고 싶었어요.

당신처럼 깊은 눈을 한 사람이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어딘가 거짓말 같아서,

사실은 많이 느끼고 있는데 숨기고 있는 것 같아서 나한테만은 다 말할 수 있는,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지나고 보니 당신이 나에게 알려준 감정들이 더 많네요.



이렇게 순식간에 끝날 거라면 왜 하필 그날 만나서 설레게 했는지,

왜 하필 이 가을에 만나서 날 힘들게 하는지 원망도 했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그날 만날 수 있어서, 이 가을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어떤 노래 가사처럼 조금만 더 그리워하다가, 때론 미워하다가, 그렇게 잊을게요.

시간이 지나 결국은 이게 서로에게 좋은 결말이었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을 때,

그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떠올릴게요.




G, 오늘도 정신없는 하루 보내고 있죠?

많이 바쁘더라도 최대한 많이 자고, 밥도 잘 챙겨 먹어요.

무조건 건강이 최고예요. 아프지 말고요. 스트레스도 최대한 안 받는 거, 알죠?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신이라는 사람을 알 수 있어서,

온 마음을 다해 설레고 그리워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덕분에 더할 나위 없는 가을을 보냈어요.

고마웠어요.


그리고, 꼭 행복하세요.

저도 그럴게요.







FROM, 스쳐간 가을 인연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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