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 라디오 타임이 준 선물#3

항상 듣던 라디오의 DJ 목소리가 다르길래 얼른 공지란을 봤더니,

며칠 동안 특집 방송을 한다고 적혀있었다.

5일 동안 각각 다른 게스트가 DJ를 한다고.

이 날의 게스트는 최근에 엄청 유명해진 어떤 코미디언이었다.


DJ로서 접하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 미디어에서 듣던 톤이 아니었다.

진지한 톤으로, 처음 해보는 진행에 긴장했다는 게 라디오 너머로 전해지는 그런 목소리였다.

하나 둘 사연을 읽고, 오늘을 위해 고심해서 골랐다는 곡들을 틀어주었다.

언제나 듣던 그 시간대의 플레이리스트와 확연히 다른 선곡도 좋았고,

긴장한 목소리로 열심히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가는 그 목소리의 신선함 역시 참 좋았다.


조금씩 그의 목소리에 적응해갈 무렵, 또 하나의 사연을 읽어주었다.

사연의 내용은 앞부분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항상 열심히 하시더니 빛을 보게 되어 좋다는 얘기로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곤 지금은 개그를 하시지만 언젠가 마지막 목표가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 것을 기억한다며,

그것 역시 응원하고 있으며 오늘의 이 특집 라디오도

코미디언 님의 인생이라는 영화 속 한 장면으로서 기억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 내용을 들은 코미디언은 이렇게 답했다.


... 네, 저는 언젠가 영화도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요.

음- 영화 같은 순간이라, 그렇죠. 일상에서도 영화 같은 순간들이 참 많죠.

그런데 혹시 내가 지금 영화 같은 삶을 살지 못한다고 느끼는 분이 계신다면,

너무 속상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모든 장면들이 다 명장면은 아니잖아요.

영화 속에서도 일상적인 장면들이 필요한 것처럼,

일상적인 장면들이 모여서 명장면이 되듯이,

평범하고 지루하더라도, 나중에 명장면을 위한 밑거름이라 생각하시면서

내 인생이 최고의 영화라고 생각하고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오늘의 이 장면도 영화 속의 한 장면이 될 겁니다.



다른 작업을 하면서 한 귀로 흘려듣고 있었는데,

이 멘트가 나오는 순간 손이 멈춰졌다.

잊지 않게 얼른 메모를 하고는 문득, 그가 선곡했던 플레이리스트를 다시 훑어보았다.

그중에는 이런 노래가 있었다.



...

지겨운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 버린 것을

쏟아지는 햇살 속에 입이 바싹 말라와도

할 수 없죠 창피하게 멈춰 설 순 없으니

이유도 없이 가끔은 눈물 나게 억울하겠죠

일등 아닌 보통들에겐 박수조차 남의 일인걸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

- 윤상, 달리기 중




모든 하루가 영화의 명장면과 같을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영화 같지 않은 하루하루에 지치는 것도 사실이다.

원하는 대로 일상은 흘러가지 않고,

목표는 시간이 지나도 멀게만 느껴진다.

힘든 일들은 한 번에 찾아오고,

견디기 어려운 일들도 어쨌든 닥치면 해쳐내야만 한다.

그러다 문득 옆에 앉은 사람을 보고는 생각한다.

저 사람은 나만큼은 안 힘든 것 같은데, 왜 항상 나만 이럴까.

언제 내 인생에 볕이 들까.


하지만 또, 동시에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이런 날도 언젠가는 끝이 날 거라는 것을.

노력한 만큼 또 다른 하루가 언젠가는 다가올 거라는 것을.

나만큼 내 옆의 사람도 다들 그렇게 견디고 있다는 것을.



스페셜 DJ로 왔던 코미디언 역시,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힘든 하루하루를 참 많이도 버텼을 거다.

버티고 버티다 보니 지금과 같은 인기를 얻게 되었을 거고,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저렇게 담담하게 대답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지칠 때면 저 곡의 가사를 곱씹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의 인기에 안주하지 않고 마지막 목표를 이루기 위해 또 전진해 나가겠지.

그 과정에서 힘든 일들을 또 마주하겠지만 이전에도 그랬듯 다시 헤쳐나가겠지.


누군가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스페셜 DJ의 짧은 멘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힘든 일들을 버티고 있던 누군가에게는,

잠깐 멈춰 서서 지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랬다.


멋진 말을 하려고 준비한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경험을 통해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단어들이어서 더 좋았다.

짧은 한순간이었지만, 인생의 한 페이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라디오가 선물해 준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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