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눈 와요."
"정말이다. 와아~"
첫눈이 내렸다. 밤하늘에 보슬보슬 흩날리는 눈이 운치 있다. 첫눈이니 더 반갑다.
"얘들아, 앉아요. 수업은 마저 하고 눈 구경하자."
기관에서 저녁에 그림책 수업하고 있다. 수업 중 올해 첫눈을 맞이했다. 흥분해서 창가로 달려가는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남은 수업을 마쳤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세상에나 하얀 세상이다. 단 두 시간 동안 쌓인 눈 치고는 너무 많다. 나중에 들으니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내렸었단다. 교실 안에 있어서 몰랐다. 시동을 걸고 운전하는데 차가 미끄러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로로 진입하였다. 아, 뭔가 느낌이 싸하다. 모든 차들이 조심조심 서행한다. 조금 겁이 나기 시작한다. 밤인 데다가 눈 쌓인 모습이 심상치 않다. 곳곳에 길가에 세워둔 차를 발견했다.
00 대교 앞에 다다르니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완전 정체다. 왜 그러지? 교통사고가 났나?
한참을 기어가듯 하는데 갈래길 앞에 교통경찰이 있다. 창문을 열고 물었다.
"여기 왜 막혀요? 사고 났어요?"
"아니에요. 못 가세요. 차가 움직이지 않아요. 어디로 가세요?"
"000이요."
"다른 길로 가시든지, 이길로 가시려면 아마 세 시간 넘게 걸릴 거예요."
잉? 이게 무슨 소리지? 여기서 약 15분 거리인데. 사고도 안 났는데 길이 미끄러워 차들이 다리를 건너지 못한다는 거다. 다리 위는 강바람에 더욱 빙판이 되었나 보다. 이거 큰일이다. 빨리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1미터만 앞으로 가도 옆길로 빠질 수 없다. 집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느냐, 세 시간이라도 기다려서 가느냐.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얼른 핸들을 꺾었다. 이미 깜깜한 밤이다. 어디로 가지? 일단 이 길에서 빠져나오자.
차는 돌렸는데 막막하다. 어디로 가야 하나.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길이 막혔어. 집에 못 갈 수도 있을 것 같아. 어떡해."
"...... 그럼 차를 길가에 세우고 잠시 차 안에서 자다가 차가 안 막히면 와."
"......."
이런 인간이, 말이니, 똥이니.
시커먼 밤중에 여자에게 한길가에 차를 세우고 잠을 자라고?
지금 차가 밀려서 못 간다고 했니? 그런 거니? 눈이 쌓여 길이 완전 불통에 다닐 수가 없다는데, 상황을 이해한 거니?
아, 맞다. 남편은 지금 침대에 누워 여느 때처럼 핸드폰과 태블릿을 거치대에 끼워 놓고 한쪽엔 드라마, 한쪽엔 스포츠 중계로 이중 시청을 하고 있을 거다. 밖에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 모를 테고, 하세월 천하태평 시간을 즐기고 있을터.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어떤 형편인지 아예 모르는 거다.
하긴, 알면 또 뭐가 달라질까. 남편이 알아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을, 원래 그랬는데, 왜, 왜 전화로 잉잉거렸을까. 이놈의 새머리.
한숨을 내쉬고 다시 머리를 짜냈다. 어디 호텔도 못 가겠고 찾는다 해도 혼자 가서 잘 배포도 없다. 어쩐다.
가까운 막내딸 네를 떠올렸지만 그곳도 다리를 건너야 하니 여기와 마찬가지 상황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딸네로 가기로 하고 전화를 했다. 엄마가 집에 못 갈 것 같아 너네 집에 간다고.
둘째 딸네를 가려면 가까운 거리인데도 의례 고속도로로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이 떠올랐다. 아이고, 안돼. 고속도로는 더 무서워. 그래, 국도로 가자.
국도로 들어서자, 아, 미처 생각을 못했다. 차가 잘 안 다니는 재개발 확정 지역으로 도로변 텅 빈 건물에 컴컴한 도로다. 오히려 눈이 더 수북이 쌓여있다. 차도 드물게 다니는 캄캄한 도로를 천천히 긴장하며 가자니 서글프고 무섭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게 무슨 고생이람. 시속 10에서 20km로 천천히 천천히 기어갔다.
딸네 집 앞 도로에서 또 한 번 정체가 일어났다. 빙판이 되어버린 도로에 서행으로 좌회전 신호 한 번에 겨우 서너 대 정도만 이동이 가능했다.
간신히 딸네 집에 도착했을 때 안도감으로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수업을 마치고 딸네집에 오기까지 여정이 스펙터클한 작전을 수행한 기분이다.
이런 첫눈을 만약 집에서 맞이했더라면 난 탄성을 지르며 마당으로 나가 눈을 맞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 바빴으리라. 어머 예뻐, 아, 아름다워, 풍성하기도 하지, 눈사람 만들기 좋겠네, 수북수북 소담스럽네, 아름다운 흰 눈.......
그러나 그날의 첫눈은 두렵고 당황스럽고 혼란의 눈이었다. 예쁘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다음날 뉴스를 보니 정말 엄청났다. 도로에 차를 두고 걸어서 퇴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눈 오는 날을 정말 좋아했는데, 자연의 힘에 새삼 놀랐다고 할까?
단 두 시간 내린 눈앞에서 무너지는 도시 질서, 자연의 위력에 인류의 문명 발전과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란 말이 무색하게, 도시는 멈추고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버렸다. 너그럽고 따뜻한 어른이라고만 생각했던 분이 갑자기 두렵고 어려운 존재로 다가올 때 기분이 이와 같을까?
다음 날 집에 들어간 아내에게 남편은 한참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생각 좀 하고 말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