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조용히 노래를 듣고 싶을 때 유선 이어폰을 꺼내 든다. 까만 레진 유닛에 작게 흰색 대리석 무늬가 들어 있고 갈색 빛이 도는 케이블이 아래로 길게 떨어진다. 보면 볼수록 정이 가는 이어폰이다. 내게는 보물 같은 존재지만 요즘처럼 버즈나 에어팟이 당연해진 시대에는 시간을 들여 찾아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물건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선이 달린 이어폰을 고집한다. 이 습관이 언제부터였나 떠올려보면 그 시작은 2014년 여름이었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되었던 나는 친구 손에 이끌려 청음샵에 들어섰다. 많은 이어폰이 늘어서 있는 그 모습은 마치 결혼식장의 뷔페처럼 두근거리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어폰을 들어보며 비싼 이어폰 가격에 놀라던 나는 어느 순간 한 이어폰 앞에서 발이 멈췄다.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분명 익숙한 노래였다. 그전까지는 앞에서 노래하는 가수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좋은 이어폰을 쓰고 나니까 그 뒤에 숨어 있던 코러스가 들렸다. 정확히는 “들렸다”기보다는 “갑자기 나타났다”에 가까웠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되감기를 눌렀다. 다시 들어도 코러스는 그대로 있었다. 평소에 내가 듣지 못하고 지나쳤을 뿐 원래 그 안에 있던 소리였다. 마치 무채색이었던 노래에 색이 칠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이어폰은 당시 가격으로 48만 원 정도였다. 그때의 나는 부모님께 용돈을 받고 부족한 돈은 아르바이트로 메우던 터라 그 돈이 정말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몇 번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고민하던 나는 1시간이 넘는 고민 끝에 그 이어폰을 사고 말았다. 훗날 엄마에게 들켜 용돈이 끊기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선택은 지금도 아깝지 않다.
그날 이후로 나는 노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흘러가는 배경처럼 두기보다는 앞에 앉혀놓고 찬찬히 지켜보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이 곡에도 이런 게 숨어 있을까’ 하는 마음에 괜히 다른 곡을 더 들어보곤 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 무선 이어폰 대신 유선 이어폰을 꺼내 든다. 나에게는 그저 감상이 아니라 찾아내는 재미에 가깝기 때문이다.
취향이라는 게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음감 취미를 하면서 배운 건 사소한 차이를 알아채는 즐거움이다. 같은 노래를 다시 듣게 만드는 힘도 결국 그 작은 차이에서 나온다. 그런 취향이 하나 더 늘고 또 하나 더 늘게 되면 내 감각도 조금씩 예민해지지 않을까. 소리뿐만 아니라 온도나 촉감, 냄새 같은 것에서도 내가 몰랐던 차이를 알아채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 평범한 하루도 지금보다 조금 더 색을 띠지 않을까. 그날 코러스가 갑자기 나타났던 순간처럼 말이다.
아마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겉으로 보이기에 단색일 것 같은 누군가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다채롭게 빛나는 면모들이 있다. 다만 우리가 다급한 일상에 지쳐 그들을 차분히 관찰할 여유가 없었을 뿐이리라. 그럴 때는 유선 이어폰을 꺼내듯 잠깐 멈추고 다른 이들을 바라보자. 그들이 꽁꽁 숨겨왔던 사소한 일면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은 쉽게 무뎌진다. 알람 소리에 억지로 눈을 뜨고 출근길을 건너는 동안에도 마음은 이미 퇴근을 기다린다. 어제와 같은 아침이 또 온다는 생각에 걱정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런 일상이 내겐 회색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취미를 통해 배운 게 하나 있다. 바로 하루가 특별해지는 방법이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는 것. 사람도 일상도 사소한 차이를 알아채는 순간 다시 색을 되찾는다. 나는 오늘도 그 색을 확인하고 싶어서 유선 이어폰을 꺼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