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옵, 인생의 첫 도전이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외국인으로서 살아남기.
오늘은 제 생일입니다. 아마 이 글이 공개될 때에는 이미 하루 정도 지났겠지만요.
오랜만에 예전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글이 쓰고 싶어 졌어요.
오늘, 다시 한번, 일본 유학 준비기간을 거쳐, 일본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된 열아홉 소녀의 이야기를 풀어놓아 볼까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간절히 꿈꿔왔던 바로 이 곳에 나는 서게 되었다.
위에 사진은,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아직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는, 나의 모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학이지만, 맘모스 대학(학생수가 많은 대학을 칭함)인 게이오, 와세다와 함께 떠오르는 학교다. (일본 내에서는 早慶上智라는 표현을 쓴다)
上智大学(Sophia University).
아시아 선교의 개척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만든 대학이 바로 나의 모교, 죠치대학이다.
외국인 교수님들이 많고, 국제 교양학부라고 불리는 영어로 수업을 하는 학과가 있어서일까, 해외에서 태어나 자랐거나, 중고등학교 생활을 한 후 일본 국내 대학에 진학하게 되는 귀국자녀들이 가득한 게 특징이다.
죠치 여대라고 불릴 정도로, 여학생 파워가 강한 것도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
사실 인터넷상에 개인의 고유 소속에 대해서 알리는 것을 나는 꺼려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운영했던 블로그에서는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공개하게 되었는가.
그건 앞으로 이어 쓰게 될 나의 유학, 취업, 회사생활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대학이라는 곳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선택한 모교, 훗날 어떻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는 앞으로 공개하는 글을 기대해 주시기를..)
지난 이야기에 썼지만, 나는 국립대학이 1 지망이었다.
하지만 반년밖에 유학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제약 안에서 그 장벽은 너무 높았다.
그래서, 2 지망으로 사립대학에 원서를 냈다.
그런데, 왜 죠치대학?
다른 대학은?
와세다, 게이오가 아닌..
어머니 아버지도 잘 모르시는 대학 죠치대학에 내가 가게 된 이유.
(와세다와 게이오에는 원서조차 쓰지 않았다)
그것은, 단 하나의 이유였다.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누군가가 만든 그런 길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아닌, 스스로 길을 개척해 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대학, 와세다 대학은 삼성전자의 이건희 회장님이 나오신 대학.
(게이오는 와세다만큼은 잘 안 알려져 있을지도..)
그리고 두 곳 모두, 매년 수백 명의 한국인이 입학한다.
그에 비해 나의 모교는, 소수정예의 대학. 전체 정원 자체가 적고, 매년 입학하는 유학생도 한 학부에 2-3명 정도.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경제학부 경영학과에 같은 해 입학하게 된 한국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Only one이 되는 길을 꿈꾸며.
일본인의 혼네와 타테마에.
일본문화에 대해서 조금 지식이 있는 분들이라면 이 두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타인과의 관계를 맺을 때, 겉으로 보여주는 모습을 타테마에(建前), 속으로 생각하면서 숨기고 있는 속내를 혼네(本音)라고 한다.
섬나라인 일본은 내부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사방이 바다이기 때문에 도망칠 곳이 없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섬 안에서 싸움이 나지 않도록, 온화한 인간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과 함께 생겨나게 된 습성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 일본 사람들과 사귀게 되면 많이 당황하게 만드는 특성이다.
나 또한 처음 일본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자 할 때, 많이 혼란스러웠다.
대학 입학 후, 같은 학과 클래스 친구들과 친해질 기회가 있었던 오리엔테이션 캠프.
한국에서 대학생활을 잠깐 경험했기에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조금 대화를 하고 친근하게 대해 주었던 친구들도,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일본 사람들은 타인과의 거리도,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멀었고,
縄張り意識(나와바리 의식)이라고 불리는,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려는 문화.
외국에서 온 나는 어딜 가도 よそ者(외계인)이었다.
그나마 사교성 있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같이 수업을 수강하러 다닐 친구들은 생겼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 쉽게 진정한 친구가 되기는 어려웠다.
대학교 1학년 공통 화제의 대부분이,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 유명한 버라이어티 방송 이야기.
나는 일본 고등학생들과 같은 시간을 공유한 적이 없었고, 그들이 무엇에 웃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몰랐다.
유학 오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일본 친구들은 원래부터가 한국에 관심이 있었기에, 대화가 끊이지를 않았지만, 평범히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학생들은 한 때 겨울연가를 시작해 몇몇 한국 드라마 열풍이 있었기에 유명한 연예인을 조금 알고 있을 뿐.
금세 대화할 거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수험 준비할 때와는 다르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을 만큼 나는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할 수 없었다.
슬랭과 같은 표현도 많았기에, 대화 도중 몇 번이나 단어의 뜻을 묻거나 해야 했다.
그것도 1대 1일 때나 괜찮지, 대여섯 명의 그룹으로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는 일일이 모르는 단어를 묻는 것도 꺼려졌다.
그래도 나는 한국인 유학생 커뮤니티로 도망치지 않았다.
몇몇 한국인 유학생과의 인연은 지금도 소중히 하고 있지만, 로마에 왔으면 로마 사람과 지내야지.
일본에 와서 한국사람들의 작은 커뮤니티 안에 있으면, 이 땅에 온 의미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일본인의 커뮤니티 안에서 내 자리를 찾으려 아등바등하였다.
학과 친구들과는 도무지 공통 화제가 없기에, 나는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좋아하는 게 같은 사람들이라면, 태어나 자란 나라가 달라도 쉽게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대화할 거리도 억지로 찾지 않아도, 같은 테마로 대화가 가능할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필름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게 취미였다.
그렇게 사진부 동아리방 문을 두드렸다.
영화에서만 봤던 암실 작업이라는, 특별한 경험에 더해, 내 예상도 적중.
깊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몇몇 일본 친구들과, 덤으로 일본인 남자 친구까지 만날 수 있었다.
(지금 남편은 다른 사람이지만, 덕분에 대학시절 즐거운 추억을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 일본어도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그건 교과서적인 일본어가 아닌, 진짜 일본에서 사는 일본 사람들이 구사하는 일본어였다.
지금도 사진부 선배가 했던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Sさん、昔より日本語汚くなったよね
(S야, 너 예전보다 일본어가 더러워졌네.)
KY, JK, むずい
지금은 이미 고어(死語)가 되어버린 표현이지만, 그 당시 내가 제일 먼저 배운 일본어였다.
교과서에는 기재되지 않았던 생생한 일본어.
일본에서의 대학생활, 반년이 지났을 무렵부터, 대화의 공통 화제가 생기고, 사용하는 언어가 자연스러워지자 내게는 금세 여러 친구들이 생겼다.
내 일상의 100%가 일본 사람과 일본어로 가득 차 졌다.
그리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이 후, 일본에서 홀로 살아남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들과 '다름'이 아닌 '같음'을 중시하게 되었다.
나는 외계인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가 아닌, 나도 너희와 같은 학교 학생이다.
라는 부분을 강조해, 나 자신에게 일본인과 같은 가면을 씌웠다.
이것은 지금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여러 의견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학을 포함해 내가 택한 선택 덕분에 지금의 이 길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마에서는 로마인으로 살고, 일본에서는 일본인으로 산다.
내가 10대 마지막에 얻은, 삶의 지혜였다.
동경에서 대학을 졸업 후, 경영&IT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일본 유학, 일본 취업에 관한 경험담을 공유하고, 멘토링 목적의 희망 포스팅을 위주로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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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을 준비 중인 예비신부이기에, 요즘은 한일 부부 포스팅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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