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원하는 대학, 학과에 진학했다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고등학교 졸업식. 3년 전, 입학식 때만 해도, 미래에 대한 부푼 가슴을 가지고 내 꿈을 이룬 모습밖에 상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한 장의 통지서에는, 수능 성적에 맞춰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대학의 입학 허가서.
대학에서는 경영학 혹은 언론학, 광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후에 광고대행사, 혹은 마케팅 관련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떤 대학, 어떤 학과에 가느냐에 따라 내 인생이 정해질 것만 같았던 그 시절.
수능시험 결과가 가져다준 선택지는, 원하는 학과를 선택해 대학 레벨을 낮추거나, 혹은 이름 있는 대학의 인기가 없는 학과에 가는가 하는 두 가지뿐이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라고 하셨다.
재수를 하는 방법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좌절과 실패감을 맞 본 나는 또 한번 똑같은 전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부모님의 자랑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표현을 안 하셨지만, 부모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다니게 될 대학과 학과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하기를 꺼려하셨다.
졸업식이라는 10대를 마무리하는 최대의 파티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딘가 씁쓸한 마음과 함께 90퍼센트의 공부와 10퍼센트의 학창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고등학교를 뒤로했다.
나는 일본어를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3년간 공부하던 일본어를 살려서 교사가 되는 방법이 있겠구나.
지겹도록 반복되지만, 마지막까지 우리 학교는 내가 교사의 길을 걷기를 기대했다.
선택지가 적었던 나는 다른 의견을 주장할 자신도 없었기에 그대로 대학에 진학했다.
그 당시에는 나 나름대로 생각했었겠지만, 재수라는 방법을 택하지 않는 이상 길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 당시에는 좌절감에 젖어서 길이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3월, 한국에서의 나의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학과 선배님들, 동기들과 함께 매일 밤 술자리에 참가하거나, 학과실에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되돌아보면, 새내기 대학생이라는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나는 어딘가 마음 한 구석에서
라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 동기들과 함께 있을 때도, 학과 행사가 있을 때도 마음 편하게 그 안에 깊숙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대학의 일본어 교육이었다.
나와 같이 예전부터 일본어를 공부했던 사람도 물론 있었지만,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1학년 첫 학기의 대학 수업은
선배님들께는 죄송한 표현이지만, 같은 학과 선배들을 둘러보아도 솔직히 내가 더 일본어 스킬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하지 않고 놀면서 대학 다니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4학년 졸업반 선배들의 일본어 실력이 내가 상상했던 레벨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곳은 언어를 '공부' 하는 곳이었다.
가슴 한구석에 가득 찬 현실과의 갈등 속에 방황하던 그때, 우물 안에 갇혀 허우적거리던 나는 한 분의 교수님과 만났다.
그리고 그분은,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의 해결책과 만나게 해 주셨다.
재일교포로 일본에서 생활하시다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셔서 교수님까지 되신 분이었다.
다른 수업처럼, 따분한 수업일 것이라 생각하며 교실에 들어섰다.
처음으로 듣는 수업이었다.
여러분, 이 수업은 신입생들을 위한 수업이에요.
앞으로 4년간 대학에서 공부하게 될 일본어 수업의 기초를 배울 겁니다.
여러 수업을 듣고 있겠지만, 저는 지금 이 시기에 꼭 생각했으면 좋겠는 게 있어요.
여러분은 일본어를 통해서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나는 눈이 휘둥그레 져 교수님을 쳐다봤다.
지금까지 첫 수업 때 이런 질문을 내던진 분은 없었다.
일본어도 우리말과 같은 하나의 언어일 뿐입니다.
언어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죠.
여러분이 공부한 일본어를 통해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나는 첫 수업 내내, 교수님의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 날을 계기로, 나는 이대로 안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게 되었고, 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돌이켜보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들을 차례차례 만들어 낸, 경제강국 일본에서 일하고 싶다.
일본에서 커리어를 쌓고 싶다.
외국에서 일하는 커리어우먼이 되기 위해서 나는 일본어를 시작했었다.
내 꿈은 여기서 끝이 아니지 않지 않은가?
내게는 아직 도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은가?
끊임없는 자문자답 끝에 나는, 교환유학생이 아닌,
일본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기 위한 길에 도전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잃을 것이 없었다.
수능성적에 맞춰 억지로 간 대학, 미래가 보이지 않는 한국에서의 대학생활.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패배자라는 뼈져린 실패가, 내가 그 때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 를 주었다.
지긋지긋했던 고3이 끝난지 반년도 지나지 않았던 그 때,
나는 다시 한번 수험생의 길을 걷고자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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