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0노스탤지어 제1회
나는 198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에는 '국민학교'라고 불렀다. 그게 일본의 잔재에서 온 단어인지 나는 몰랐다. '초등학교'란 명칭으로 바뀌었을 때, 그 명칭이 일본의 잔재란 것보다, '국민'을 만드는 학교였다는 사실이 더 섬칫했다.
일본인들은 국민학교를 이렇게 설명한다. "다 같이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라고. 요이 땅!했을 때, 옆으로 뒤로 뛰는 사람 없이 누구나가 앞을 보고 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교라고 한다. 그게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일 것이다. 요이 땅! 했는데 얘는 뒤로 뛰고 쟤는 오른쪽으로 뛰고 또 다른 아이는 앞으로 뛰어간다면 달리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니까.
모두에게 앞이 어딘지를 알려주고, 뛰게하는 것. 더불어 경쟁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 결과적으로 모두가 같은 방향을 보는 것. 그것은 국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다 같이 국가가 원하는 곳을 보고 뛰며, 경쟁에 의해서 타국을 식민지로 삼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걸까. 모두가 한 곳을 본다는 것은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이 국민학교를 만든 이유는 아무래도 제2차대전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본다. 군대에서 앞으로 전진!이라고 소리쳤는데 뒤로 돌아가는 군인이 나오면 아니되지 않는가. 일본의 국민학교는 국민의 기초교양을 위해서 1941년에 지어졌다가 1947년에 소학교로 이름을 변경했다.
국민학교란 단어 얘기를 하려던 것이 아니다. 국민학교 하면 '도시락'이었다. 나는 천안과 성환 사이의 시름세란 곳의 작은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1980년대 중반 그 작은 학교에는 난방 시설이라곤 난로 하나였다. 겨울엔 아이들이 양은도시락을 난로 위에 쌓아둔다. 퀘퀘한 냄새가 나는 도시락들이 차곡차곡 쌓인 풍경은 조금도 나쁘지 않았다. 아이들은 주로 밥과 김치를 가져왔다. 가장 폼나는 반찬은 장조림이었다. 시골에선 비엔나 소시지는 누구나가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양은도시락이 부러웠지만, 엄마는 내게 보온도시락을 선물해주었다. 그래서 한 번도 양은도시락통을 가져보지 못했다.
시골마을에서 도시로 전학을 갔다. 도시 아이들은 양은도시락을 가져오지 않았다. 난로는 여전했지만, 아무도 그 난로 위에 도시락통을 올려두지 않았다. 물이 든 주전자가 김을 뽑아내고 있을 뿐. 도시의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코끼리표 보온 도시락을 사용했다. '코끼리표'? 그게 뭔지 몰랐지만 우리는 그걸 코끼리표 보온 도시락이라 불렀다. 코끼리표 도시락통은 연분홍과 소라색이었고, 나는 당연히 소라색을 골랐다. 나는 참한 아이였다. 학교에선 늘 얌전하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나는 왜 얌전한 게 칭찬을 받아야하는지 의아해했다. 친구들은 나를 새색시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그 별명을 눈꼽만큼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마음을 눈꼽만큼도 표현할 수 없는 쪼다였다. 나는 그랬다. 나는 가장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저 나의 이미지가 여성에 국한된 것이 어린 마음에도 불편했다. 다시 태어나면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분홍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나의 이미지가 여리고 얌전하고 참한 여아라는데 조금, 아니 상당히 화가 났다. 나는 늘 파란색 바탕의 노트를 사용했고, 코리끼표 도시락은 당연히 소라색을 골랐다.
엄마는 소라색 코리끼표 도시락통을 가득 채워주었다. 밥 위에는 치즈를 곱게 썰어 올린다. 학교에서 열어보면 치즈가 녹아서 밥 위가 탐스러운 노란색이다. 엄마는 장조림도 잘했고 콩장도 맛있었지만, 최고는 두부조림이었다. 두부조림을 싸가는 날이면, 우리반 아이들 모두가 탐스러운 눈으로 나를 동경했다. (아 이건 너무나 과장된 표현이다) 여하튼 우리반에는 공부를 잘하고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얀, 무척이나 사교적이지만 성질이 그다지 좋지 못한 남학생이 있었는데, 그 남학생은 "야 니네집 두부조림 최고다. 너 매일 이것만 싸와라."며 명령조로 말했다. 나는 그런 말투가 너무나 싫어서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비실비실 웃었다. 아마 웃었을 것이다. 나는. 나는 그렇게 별볼일 없고 내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아이였으니까.
나는 늘 사람이 그리웠다. 나에게 다가와주는 사람은, 무작정 좋아했다. 그 아이가 나를 이용하려고 해도, 내 물건을 탐하고 훔쳐가도. 그걸 알면서도 싫은 소리도 못하고 비실비실 웃었다. 그 시절의 나를 돌이켜보면 꿀밤을 선물?하고 싶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다.
엄마의 두부조림. 두부를 참기름에 구운 후, 간장 설탕 고춧가루를 넣어 조린, 정말 특별할 것 없는 요리였다. 내가 엄마가 된 후, 가끔 도전하는 요리인데, 이게 참 이상하다. 아무리 해봐도 맛있게 만들기가 쉽지 않다. 왜 한국 두부가 아니어서? 일본의 두부는 물이 너무 많아서 맛 배기가 어려운 게 아닐까? 그렇게 두부 탓을 해본다.
일본에 와서 놀란 것들은 하나둘이 아니지만, 아무도 보온도시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일본은 코끼리표 보온 도시락통의 원조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저 코끼리표=조지루시는 대체 일본에서 뭘 팔아 장사를 한단 말인가? 조는 일본어로 코끼리다. 조지루시는 일본에선, 보온밥통으로 유명하다. 보온밥통으로 일본 시장을 평정한 브랜드다. 일본은 1954년부터 초등학교 급식이 시작되어서, 우리에게 그토록 유명한 코끼리표 보온 도시락이 일본에선 전혀 유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존재를 아는 사람도 드물다.
내게는 엄마가 만들어준 두부조림이 도시락의 추억이다. 요즘 학생들에게 급식의 추억이 있듯 일본인들에게도 급식의 추억이 있다. 1970년대까지 급식 때 고래고기가 나왔다. 일본이 포획한 고래를 그렇게 소비했다. 요즘은 더이상 고래고기가 나오지 않는다. 먹이연쇄의 피라미드 꼭대기가 있는 고래는 수은 등으로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짙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고기를 대량으로 학생들에게 먹일 수가 없어서 고래고기를 썼다고 한다.
일본은 어린이집부터 중학교까지는 기본적으로 급식이 나온다. 학교가 사립일 경우엔 급식 대신 돈을 내고 사먹는 식당이 있거나 도시락을 가져가야 한다. 어린이집의 경우에도 초등학교도, 그날 그 자리에서 만든 음식만 제공해야 한다. 급식 조리사를 채용해야 하고, 급식을 만들 공간과 식당이 없으면 어린이집 허가를 받을 수 없다. 초등학교의 급식을 가장 먼저 먹는 사람은 교장 선생님이다. 급식에 독은 들어있지 않은지 맛은 괜찮은지 배탈은 나지 않는지. 교장 선생님의 역할은 이렇게 학생들의 건강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된다. 조금 믿음직스럽다.
아이가 태어난 후 가끔 도시락을 싼다. 소풍을 갈 때다. 일본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캐릭터 붐이 새롭게 일기 시작했다. 만화에서만 보던 캐릭터가 이제는 각 지자체마다 자신들의 캐릭터를 생산해내기 시작했고, 하다못해 동네 시장도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캐릭터 붐은 도시락에까지 미쳐서 아이들 도시락은 요리자체보다 비주얼로 승부를 본다.
나는 한국에서 국민학교를 다녔고, 딸은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닌다. 우리는 아마 먹는 것도 다르고, 배우는 것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를 것이다. 모두가 다 같은 곳을 보는 사회가 아니라, 조금 다른 곳을 봐도 되는 사회였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