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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Jun 10. 2016

그많던 '미제장수 아줌마'는 어디로 갔을까

8090노스탤지어 제2회

전지분유. 가끔 먹고 싶다. 일본의 수퍼마켓에 가본다. 그게 그렇게 쉽게 눈에 띄이지 않는다. 일본에선 구하기가 참 힘들다. 어쩌다 구해서 먹어봐도 그 맛이 아니다. 내가 어릴 때 먹은 전지분유와 대체 뭐가 다른 걸까.


미제장수 아줌마. 우리는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아줌마'가 무언지 우리는 별로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몸빼를 입고 있거나 후줄근한 차림의 여성이었다. 그녀가 몇 살인지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양손에 또 보자기로 싼 보따리를 들고, 먼 길을 걸어 우리집까지 찾아왔다.


우리집은 농촌이었고, 목장이었다. 그나마 그 동네에선 가장 잘 사는 집이었다. 그녀가 우리동네에서 유일하게 찾는 집이 우리집이었다. 그녀는 머리에 인 짐을 푸르고, 양 손에 든 보자기도 풀렀다. 요즘은 흔히 볼 수 없는 보자기가 그 시절엔 유일한 짐싸개였다. 우중충한 보자기 안에서는 미국 제품들이 쏟아져나왔다.


엄마는 늘 가루 주스와 넛츠를 챙겼다. 지금이야 껍질을 깐 다양한 땅콩류가 하루 한끼용으로 포장되어 나오는 시절이지만, 1980년대 중반에는 땅콩과 호두, 잣 이외의 넛츠는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아마 그 존재를 아는 사람도 드물었을 것이다. 나와 엄마도 미제장수 아줌마의 손을 통해서 그것들을 맛보았는데, 그들의 이름이 피스타치오인지, 커슈넛인지, 마카다미아인지는 1990년대에나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밤엔 망치로 그 단단한 껍질을 벗겨냈다. 그 흰 속살은 달콤하고 고소했다.  


그 미국 물건들을 들고 오는 그녀를 우리는 '미제장수 아줌마'라고 불렀는데, 그때는 여성을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는 사실도 몰랐고, 그냥 '아줌마'가 전부였다.


엄마는 서울 신설동에서 통역사인 아버지와 다방을 경영하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엄마의 아버지, 즉 나의 외할아버지는 2차 대전 당시에는 홍콩에서 중국어와 영어로 통역을 했고, 일본어는 물론 그 시절을 겪은 누구나가 그렇듯 잘 했으며, 전쟁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도 통역으로 일하셨다. 미군 부대 일도 잦아서, 미군용 음식을 얻어오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얘, 그 시절에 우리집엔 공책만한 초콜릿이 있었다."

엄마는 자랑삼아 얘기했다. 엄마네 집에는 외할아버지가 받아온 정말 공책만큼 커다랗고 두께도 두꺼운 초콜릿이 있었을 것이다. 미군을 한국까지 보낸 미국정부의 배려였겠지. 초콜릿 먹고 극동 지역을 지키라는. 그리도 치즈.

"팔뚝만한 치즈도 있었지."

1980년대, 치즈를 구하기 힘들었다. 그건 미제품 가게에 가야만 얻을 수 있었다. 낙농업이 없던 시절도 아닌데, 왜 우리나라는 그런 걸 만드는데 소홀했을까. 유제품류가 매우 부족했던 시절이다. 요플레가 나온 게 1983년이니까.


미제장수 아줌마는 늘 팔뚝만한 치즈를 들고 찾아왔다. 우리집 냉장고에서 치즈가 사라질 즈음에. 우리는 그녀의 이름도 몰랐고 나이도 몰랐지만 그녀는 언제쯤 우리집에 치즈가 필요할지 귀신같이 알고 찾아왔다. 춥파춥스와 같은 사탕도 있었고 철통에 든 캔디를 가져오는 날도 있었다.


엄마에게 그녀는 구세주였다. 서울에서 살던 엄마가, 사람을 만나려면 걸어서 나가야 하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데다 또래라곤 찾아보기 힘든 시골 마을에서 수다를 떨거나 어릴 적 먹던 미제품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미제장수'아줌마였다.


그러다가 우리는 시골을 나왔고 더이상 미제장수 아줌마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동네 시장의 미제품 판매점을 찾아가 치즈와 가루 주스를 구입했고 가끔 체리절임이 든 커다란 유리병을 사기도 했다. 엄마는 "소시지도 미제가 최고"라며 짭짤한 소시지를 냉장고에 구비해두고, 도시락에 넣어 주었다.


그 당시엔 미국산 수입이 풀지 않은 시절이었고, 우리가 맛보고 즐거워했던 음식들은 미군들이 용돈 만들려고 배급받은 물건들을 밀매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때는 영어가 쓰인 티셔츠도 입지 말라던 시절이었다.


그 많던 미제장수 아줌마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미정부는 모를 것이다. 당신들이 미군에게 보낸 그 풍족한 음식들로 인해 수많은 한국인들이 "역시 미국"이라고 소리쳤던 사실을. 아니 그것까지 계산하고 보낸 것이었을까. 나는 아직도 가끔, 그 맛대가리 없는 미국산 체리 절임의 향이 그립고, 미국산 짜고짠 소시지가 먹고 싶다. 우리에게 향수를 남긴 것은 오로지 한국적인 것들이 아니다. 80년대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흥미로운 시절이었다. 어떤 하나의 문물이 이제 막 우리의 입구에 진입했던 시절, 미국은 우리에게 '맛'을 통해 또한번의 동경을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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