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일상다반사(2)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
오늘은 눈이 내렸다. 5년전에도 폭설이 내렸는데 그 날 기억하니? 나는 둘째를 안고 너는 우리 큰아이 손을 끌고 20분쯤 되는 그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왔지. 당시 나는 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논문을 준비했지만 아이 둘을 데리고는 논문은커녕 학교에 갈 여유도 부족했고, 맞벌이가 아니면 허락되지 않는 어린이집 제도 때문에 고민에 고민을 한 결과, 나는 비상근 강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교수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육아가 발목을 턱 하니 잡더라. 누나는 그 시절, 누나의 삶이 너무나 처량해, 네가 더 잘 살기를 바랐다. 너라도 성공하면 내 마음이 조금은 풀릴 것 같았거든.
너는 너대로 엄마가 돌아가신 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겠지. 우리는 서로가 처한 환경에서 조금더 위로하고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너는 나에게 “우리는 너무나 다르다”고 했고, 나도 더 다가가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얌체, 새침떼기, 깍쟁이로 통하던 누나가 너에게는 얼마나 야속한 존재였을까. 그걸 모르지 않지만, 그렇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다고 하면 그건 변명일까?
너는 병실에서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있을까? 너도 엄마도 겨울을 참 좋아했는데. 엄마는 죽음을 앞두고 병실에서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자기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엄마는 잘 알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가을을 한 번만 더 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해 9월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고 가을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가을이 안 오는 게 마냥 서운했다. 엄마 병실에 아름답게 물든 단풍조각 하나 붙여주지 못했는데, 그걸 붙여주면 엄마가 영영 떠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누나는 초등학생 시절, 까칠한 얼굴로 학교에서 돌아오던 너를 기억한다. 우리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 이모네 집에 맡겨졌고, 그 집에서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목 빼고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너의 누나로서, 너를 진심으로 기다려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너에게 별다른 힘이 되어주지 못했고, 처음 온 서울에서 서울 아이들 사이에서 부딪히며 내 자리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너는 나보다 항상 밝았고 나보다 친구를 사귀는 법도 잘 알고 있었고 밝은 성격 때문에 늘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좀 안심했고, 너를 돌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 사이의 이런 응어리가 하루 아침에 생긴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우리는 어는 시골 마을에서 여전히 양반이라며 떵떵거리는 증조모와 조부와 조모 사이에서 컸고, 부유하고 배운 집안이라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태어난 후 얼마간 이름이 없었다. ‘아가야’라고 불렸다. 내가 딸이었기 때문이다. 집안 사람들 모두 아들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탓이다.
나에게 이름이 생기고, 2년이 지나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어른이 아무도 없을 때 네 뺨을 휘갈겼을 게 분명하고, 그걸 본 어른들은 내가 질투심이 강하다고만 했지, 아무도 내 마음을 위로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네가 셋이었을까? 조모는 너와 나에게 신문지로 모자 접는 법을 가르쳤다. 어릴 때부터 나는 머리가 비상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한글을 알아서 읽었고, 집집마다 걸린 간판의 전화번호를 모두 외우고 있어서 전화번호부를 보는 대신 나에게 묻는 어른들이 더 많았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아이였다. 그런 내가 조모 앞에서 벌벌 떨며 모자 접는 법을 배운 것은 조모가 너를 특별히 아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나를 천대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한 번에 접지 못했는지 아니면 조모에게 말 한 번 더 걸어보고 싶었는지, “할머니, 모자 만드는 법 한 번만 더 가르쳐 주세요.”라고 했다가 역정을 들어야 했다. 나는 그날 그 자리에서 울지 못했다. 나는 그런 아이였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싫었지만, 자존심 상한 일을 굳이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우리는 그런 집에서 컸고 나는 그래서 네가 정말이지 눈엣가시였다. 너는 늘 나를 따라 다니고 나를 만지고 싶어하고 “누나 누나”하며 따랐지만, 나는 그런 너를 조금도 사랑은커녕, 이뻐하지도 못했다.
그런 나를 만든 건 어른들이지만,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건 내 탓이리라.
2021년 12월 말, 병원에서 문자가 왔을 때, 나는 네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행히 너는 살아있었고, 나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내가 너를 안아주고 다독이고 사랑하지 못한 벌을 이렇게 받는 게 아닌가 싶어서 가슴이 아팠다.
아빠라 돌아가셨을 때, 너는 초등학교 3학년, 나는 5학년이었다. 아빠는 학교의 이사를 맡고 있어서 우리는 꽤나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아빠가 돌아가시고 형편이 어려워지자 우리를 신경 쓰는 교사는 아무도 없었다. 너희 반 담임은 공공연히 아이들 앞에서 너를 저능아라고 했고, 우리반 담임은 나를 아빠 없는 아이로 취급했다. 우리는 인생의 단맛을 알아야 할 시기를 고스란히 놓치고, 쓴맛을 더 많이 보며 컸다.
이모네 집에서 내가 너를 기다려주는 단 한 사람이었다면, 너의 인생은 바뀌었을까? 너의 2021년 12월말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왜 우리는 남매로 태어나 반목하고 살아왔을까? 나는 항상 너를 걱정한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가족은 나몰라라 살아다가 문득 떠오르는 걱정의 대상이다.
나는 우리의 어릴 적을 생각하면 수많이 떠난 가족여행도 떠오르지만, 초등학교 시절 어린 네가 이모네 집으로 돌아와 외롭게 앉아 있던 모습과, 네 다 터진 볼만 기억이 난다. 그때 로션이라도 발라줄 걸. 그랬다면 우리의 관계가 달라졌을까? 그런데 그러기엔 나도 너무 어렸다.
나는 앞으로도 우리가 쉽게 친한 남매가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핏줄이란 너랑 나, 그렇게 외로운 사이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네 인생을 열심히 잘, 그리고 평안하게 갔으면 좋겠다. 우리가 서로를 조금은 따뜻한 눈으로 지켜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네가 건강을 찾을 때까지, 우리 어떻게든 또 살아보자.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의 편이 되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도 인생의 단맛을 맛볼 날이 오기를, 그런 날이 너에게도 나에게도 찾아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