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일상다반사(3)
당신이 밉지만, 당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어서 아빠에게
얼마전 동생을 만났고 우리는 당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만 하자, 아빠 얘기.”
동생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 당신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가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픕니다. “너무 자기 멋대로 살다갔어.”라고 동생은 말했습니다.
1951년 2월 18일에 태어나 1987년 10월 18일에 돌아가신 우리 아빠.
우리가 이렇게 기록하지 않으면, 모두가 당신의 존재를 잊을 것 같아 기록해 두기로 합니다.
당신은 좋은 아빠도 좋은 남편도 실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가 주신 병원비를 가지고 당신은 사라졌습니다. 그 돈으로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지요. 엄마는 친정어머니, 그러니까 우리 외할머니가 간신히 만들어온 돈으로 병원비를 내고, 저를 안고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엄마는 시댁에서 딸아이가 태어나 병원비를 주지 않았다고 오해를 했습니다. 설마 남편이 그 돈을 가지고 술을 먹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렇게 내내 속을 썩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엄마는 그래서 위장병을 앓게 되었고 여러 번 입원했으며 엄마가 입원해 있는 동안 저와 동생은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맡겨졌을 뿐, 아빠 당신이 우리에게 밥 한 번 차려준 사실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한제국을 손에 넣은 일본은 한국으로 건너와 모든 사업권을 손에 쥐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는 광산을 개발하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금광, 은광 모두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증조할아버지는 일본인들이 하지 않는 사금채굴을 시작합니다. 운이 좋게도 증조할아버지는 금맥을 맞췄고 그야말로 일확천금을 얻었습니다. 그후로 증조할아버지는 평양까지 가서 일본인들이 손을 대지 않는 산들을 찾아 개발을 시작합니다. 당신은 그 집안의 손자로 태어났습니다. 평생 먹을 것 입을 것 배울 것이 모두 보장된 집에서 태어났지만 당신은 늘 외로웠습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서울로 유학 보내졌고, 서울의 커다란 집에 덩그마니 혼자, 아니 가사도우미와 가정교사와 함께 생활했습니다.
중학교 시절 여름방학에 집으로 돌아온 당신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할아버지가 그러니까 당신의 아버지가 외도로 아들을 낳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재산을 그 아이에게 물려줄 것이라는 소문도요. 왜냐하면 당신 편이던 막강한 증조할머니는 돌아가셨고, 할머니 또한 돌아가셔서 그 아이를 낳은 여자가 그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당신은 갈 곳을 잃었고 서울에서 외롭게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울로 돌아간 당신은 음악에 빠져 서울예전에 진학하지만, 아들이 딴따라가 되는 것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볼 수 없다는 할아버지 때문에 결국 다시 입시를 치르고 연세대에 들어가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은 자꾸 빗나가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당신의 연인이자 우리들의 엄마를 만났습니다.
당신은 엄마를 만날 때면 꽃다발이 아니라 시골에서 부쳐온 달걀 한 판이라든가 무라든가 배추와 같은 식재료들을 선물했고 엄마는 그런 순진한 청년을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위병으로 입원했을 때는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와 말동무를 해주던 그런 진솔함에 엄마는 감복해 결혼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친정식구들은 부잣집에 시집을 갔다며 좋아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겐 이렇다할 직업이 없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수만평의 논을 경작하고 과수원을 가꾸고 소들을 돌보고 우유를 생산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가수가 되고 싶었던 당신에게 그런 것들은 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한량일수만도 없었던 당신은 새벽같이 일어나 소 젖을 짜고 논과 밭을 일궜습니다. 그러다 농한기가 되면 목장은 일꾼에게 맡긴 채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당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취를 감추면 석 달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키웠는지 저는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당신과 정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워낙 오래 혼자 성장해야 했던 당신은 가족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아빠,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모두에게 친절하고 따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 당신은 없는 것과 다름없는 존재였습니다. 아빠가 없어도 일꾼들이 있으면 농장도 목장도 문제없이 돌아갔으며, 우리는 별 불편함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주말이나 여름이면 가족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과 자동차를 좋아하는 당신 덕분에 우리는 한국의 거의 모든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 와중에도 부부싸움은 끊이지 않았고 여행 내내 불편했던 기억 또한 있습니다. 아빠도 엄마도, 두 분 모두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외로웠고, 배신감을 느꼈을 게 분명합니다. 목장과 논밭 이외에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그 넓은 초원에서, 독박육아를 했던 엄마는 점점 초췌한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엄마는 우리 남매가 싸우면 매를 들었습니다. 주로 동생에게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도저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정도의 다툼은 어느 남매에게나 있을 법한 일입니다. 하지만 엄마에겐 그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많이 울었고 동생도 그러했습니다.
저는 동생이 자기를 돌보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 기초가 바로 엄마의 매질 때문이 아니었는지 의심스러우며 그 빌미를 제공한 당신 탓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는 집도 있고 일도 있고 가족도 있었는데 당신은 자신을 패배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시에서 더 번듯한 사업을 해서, 외도로 아이를 낳은 아버지에게 보란 듯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시골을 떠나 도시로 나오지만, 당신에게 사업 수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당연한 일입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살아온 인물입니다, 당신은-, 독특한 아이디어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먹고 살 만한 돈이 있었습니다. 농장을 팔고 얻은 수억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돈을 친구에게 또 친척들에게 아주 쉽게 빌려주었습니다. 돈을 빌려줄 때만 오냐오냐 해주는 그런 칭찬들이 당신을 춤추게 해줬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돈을 갚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또 집을 나가기 시작했고 바람을 피웠고 엄마는 울었고 오랜만에 집에 온 당신은 “남편이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아무도 반가워해주는 사람이 없다”며 엄마에게 손을 댔습니다. 어느날은 베란다에서 던져버리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모든 것을 보며 모른 척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엄마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서른 여섯이 된 그해, 당신은 자동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엄마는 우리에게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울었고 외삼촌은 아이들에게 그런 마지막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막았습니다. 당신은 훤칠한 키에 인물도 좋았습니다. 그건 저와 동생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당신의 마지막 모습은 우리에게 보여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고 합니다. 내 안에서 당신은 평생 서른 여섯입니다. 그래도 당신이 엄마를 죽이기 전에 죽어서 다행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동생도 그랬을 것입니다. 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당신은 잃어도 엄마를 잃을 수는 없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삼 년, 저는 당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죽는다는 당연지사를 알고는 있지만 씹어 삼키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사실 당신의 장례식에서 울지 못했습니다. 엄마 눈치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더 힘들어할 것 같아 차마 울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삼 년간 저는 길거리 거리에서 당신의 모습만을 찾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고, 죽었을 리가 없으며 어딘가에서 나타날 게 분명하다고 삼 년만 기다려보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도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한 가지 확실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열심히 살라는 그것입니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이고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단히 열심히 살았습니다. 중학교 시절엔 여학생이라곤 단 한 명인 바둑부에 들어가 바둑을 두었고 고사성어를 배웠고, 그러는 사이 영어 말하기 대회, 국어 말하기 대회, 각종 백일장에 나가 상을 탔습니다. 고교시절엔 연극을 했고, 연극을 한 덕분에 일본의 좋은 대학에 들어갔으며, 대학 시절에도 무작정 연극동아리를 찾아가 연극을 했습니다. 일본어도 잘 모르면서 배짱도 좋지 연극 무대에 서기도 했습니다. 공부에선 학교가 알아줄 정도로 성적이 좋았고, 저를 맡은 담임 선생님들은 반 평균 성적을 올려준다며 좋아했습니다. 대학에 붙은 날에는 담임 교사가 “고3 김민정, 대학에 합격했습니다”라고 교내 방송을 해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는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제가 6살 때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건데 왜 태어나는 거야?”
엄마도 대답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죽음 이후, 어차피 죽을 것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당신을 원망했습니다.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빠, 아이와 잘 놀아주지 못하는 아빠, 아이 마음을 읽지 못하는 아빠, 무작정 선물만 안기고 피식 웃는 아빠, 엄마에게 손찌검하는 아빠, 과묵한 아빠, 어느 하나도 이상적인 아빠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권력에 대항하는 법을 알려줬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교사의 말이 전부는 아니다, 불필요한 사람에게 머리 숙일 필요는 없다. 자신의 권리를 알아야 한다, 교사에게는 숙제를 내줄 권리가 있지만 학생에게는 그것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행복을 찾는 것이 첫번째 권리라고 말해준 사람이 아빠, 당신인 것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 당신을 미워해야 하는데, 사실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엄마조차 암투병 당시 당신이 꿈에 한 번이라도 나와 주길 기도했습니다. 이승에 없는 만날 수 없는 옛남편이 꿈에라도 찾아와 주기를. 우리는 당신을 미워하고 싶은데 당신이 애처롭고 사실은 당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수십번, 수백번 당신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썼습니다.
아빠 없이 자라는 사람은, 아빠가 없는 게 죄도 아닌데, 그걸 언제 어떻게 주변 사람들에게 밝혀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숨긴 것도 아닌데 숨긴 사람이 되는 것처럼 억울한 일은 없으니까요. 그럴 때마다 당신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에게도 든든한 아빠가 있었으면,까지는 바라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실 아빠라는 존재가 어떤 건지 잘 모릅니다. 당신이 평범한 아버지는 아니었잖아요.
가끔 생각합니다. 언젠가 제가 찾아가면 아빠랑 엄마랑 우리집 셰퍼드 케리가 저를 마중나와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거기 죽은 우리집 식구들이 모두 있어서 재산 싸움도 하지 않고, 서로를 비교하거나 하지도 않고 그래서 아빠 마음이 편하고 엄마도 신경을 덜 쓰면서 그렇게 살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시간이 흘러 저는 벌써 당신이 사망한 그 나이, 서른 여섯을 훌쩍 뛰어 넘었습니다. 세월이 이렇게 빠르다는 걸 알았다면, 당신이 짊어진 그 무게가 조금쯤 가벼워졌을 것 같은데. 그때 우리 가족은 시간의 무게나 속도를 잴 여유가 너무나 없는 시기였던 것이었겠지요. 아빠의 묘비에 ‘슬기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적은 열 한 살의 저는 이미 어른이 되었는데 슬기로운 사람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나이를 넘는 날이 오리라곤 사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죽으니까 열심히 살라고 당신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당신의 인생이 저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빠, 사진 속의 아빠는 여전히 젊고 멋있더라.
나는 그냥 아빠한테 조금 더 사랑받고 싶었는데, 그땐 내가 너무 어려서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몰랐어. 아빠가 그걸 알면 좋았을 텐데, 그치?
아빠가 돈을 남 빌려주지 않고 흥청망청 안 쓰고 살았으면 우리가 지금쯤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고, 우리 동생도 이렇게 힘들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살다 보니 말야, 아빠가 가르쳐 준 모든 것들이 부자들에게나 필요한 덕목이지, 우리처럼 서민에게는 그런 것들도 부담이 되더라. 아빠는 그런 것도 몰랐지? 내가 다 아빠한테 가르쳐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빠, 나는 내가 빨리 집으로 오라고 해서, 아빠가 빨리 집으로 오려다가 사고가 난 것 같아서, 다 내 잘못 같아. 그래,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겠지만, 그래도 나는 항상 마음이 무겁더라. 나는 말야, 아직도 어딘가 도로 변에 <사고 목격자를 찾습니다>과 같은 간판을 보면 마음이 무너진다. 그렇게 남겨진 가족들이 생각나서 말야. 남겨진 사람들이 잘 살았으면, 부디 마음 편히 잠들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내가 중학생 때는 항상 그것만 기도했는데.
내가 슬기롭게 살 수 있을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열심히 잘 살아볼게.
아빠,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