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일상다반사(4)
오타 시즈코, 1913년 시가현에서 태어났다. 규슈지역에서 대대로 의사를 해온 집안의 넷째딸이었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의 짓센여대 가정학과에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해 시를 쓰는 교실에 다녔고, 1934년에 <의상의 겨울>이란 시집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문학부로 편입하려 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결국 퇴학을 했다. 도쿄에 남아 시를 쓰고, 프랑스에 왔다는 화가와 연애도 했지만, 1938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전쟁은 길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그해 겨울에 결혼을 택했지만 2년도 못 되어 헤어졌다. 태어난 아기가 한달도 못 되어 죽은 직후였다.
1941년 아이의 죽음과 이혼,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그녀는 한줄기 빛을 발견한다. <허구의 방황>, 다자이 오사무의 책이었다. 그녀는 곧장 편지지를 꺼내들고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이가 죽은 후 얼마나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는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다자이 오사무가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 “한 번 놀러 오세요.”
그렇게 사랑은 시작되었다. 오타 시즈코는 친구와 함께 결혼해 살고 있는 다자이 오사무의 집을 찾아갔고, 그와 짧은 데이트를 했고, 다자이는 그녀에게 지금까지 써놓은 글이 있으면 달라고 말한다. 책을 함께 내자는 제안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기를 다자이에게 제공하고, 다자이는 그 일기를 바탕으로 <사양>을 써냈다. 하지만 <사양>의 표지에 그녀의 이름은 쏙 빠졌다. 1947년 11월 오타 시즈코는 딸을 출산한다. 그리고 1948년 다자이는 그의 애인 중 한 명이었던 야마자키 도미에와 함께 강에 뛰어 들었다. 그의 나이 서른 아홉이었다.
오타 시즈코는 홀로 아이를 키우게 된다. 글을 쓰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일기가 <사양>으로 발표된 후, 그녀는 그 댓가로 10만엔을 받고, 더이상 언급하지 말라는 계약서까지 썼지만, <사양일기>를 발표했고, 1950년에는 <가난한 나의 노래>라는 책을 펴냈다. <사양>의 대부분의 스토리가 그녀가 쓴 일기와 일치하듯, 오타 시즈코는 문장력이 뛰어난 작가였지만, 일본사회에서 그녀는 다자이 오사무의 수많은 불륜행각의 등장인물 중 하나였을 뿐, 아무도 그녀를 작가로 대우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본의 문학계는 이렇게 뛰어난 작가를, 그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잃게 된 것이다.
가사도우미, 기숙사 사감 등으로 일해 딸을 키우고 1982년 69세의 나이에 간암으로 사망했다. 오타 시즈코가 홀로 키운 딸이 오타 하루코이며 지금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하루코의 ‘하루’는 다자이 오사무의 ‘오사무’라는 한자를 고스란히 물려 받은 이름이다.
영화 <다자이 오사무와 세 명의 연인들>에서 사와지리 에리카가 맡은 역이 바로 오타 시즈코다.
나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오타 시즈코의 딸인 오타 하루코를 만나게 되었다.
오타 하루코 작가는 1967년 20살 때 쓴 기행문 <쓰가루>가 부인공론 독자상을 수상한 후, 추가한 내용을 담아 <수기(17세 노트)>로 발표하면서 작가로 등단했다. 그후 NHK의 미술 다큐에서 사회를 보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고, 1986년 어머니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은 <마음 기록>이 츠보타 조지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나오키상 후보에도 올랐다.
김승옥 작가님이 일본에 다큐를 촬영하러 오신다는데, 평소 좋아했던 다자이 오사무 관계자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식들 중 한국에 알려진 인물은 소설가 “쓰시마 유코”씨다. 안타깝게도 2016년에 사망해, 김승옥 작가님과 만날 수 없었다. 대신 오타 하루코 작가를 추천했고, 나는 바로 오타 하루코 작가를 만나러 갔다.
오타 하루코 선생님(나의 에세이의 선생님이기도 하니, 선생님이라 칭하겠다)은 도쿄의 여러 문화 센터에서 에세이 강좌를 열고 있다. 취재에 협조를 구하려면, 무엇보다도 상대와 친해지는 게 최고다. 단순히 취재 협조의뢰서를 보낼 수도 있지만, 취재도 의뢰하고 덕분에 에세이도 배울 수 있다면 일석이조가 아닐까?
급히 에세이 클래스에 등록을 하고 찾아갔다. 도쿄의 변두리 한 신문사가 운영하는 문화 센터, 학생은 스무 명쯤 되었다. 오후 4시부터 시작하는 클래스에는 60대부터 90대까지 고령이라고 해도 폭넓은 학생들이 있었다. 2주 전에 에세이를 제출하면 오타 하루코 선생님이 교정을 해주시고, 그 원고를 쓴 학생이 직접 클래스에서 발표를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오타 하루코 선생님은 전쟁에 대해 언급하며 일본이 큰 잘못을 저질렀고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 꾸준히 반성해야 한다고 말씀을 꺼내신다. 학생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써간 에세이에 대해서도 열심히 써서 꼭 책을 내도록 하라고 격려하신다.
오타 하루코 선생님은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글을 좋아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꾸준히 글을 썼다. 1987년에 결혼해 딸을 낳았고, 이혼한 후 글을 써서 딸을 홀로 키워왔다.
‘다자이 오사무의 딸’로 불리는 게 여전히 석연치 않다고 하신다. “다자이 같은 남자는 질색이야”라고 말이다. 자신의 아버지이지만, 자신은 본 적도 업으며, 어머니의 글을 빼앗아 소설을 내고 하루 아침에 사라진 남자. 그런 남자가 아빠라면, 그의 딸은 오랫동안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가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에 이렇게 알려지는 동안, 그 그늘에서만 살던 오타 시즈코 작가, 그리고 오타 하루코 작가에 대해 생각한다.
봄이 오면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 나는 또다시 오타 하루코 선생님의 글쓰기 교실에 나갈 것이다. 내가 아닌 사람들이 쓰는 글을 읽는 것은 매우 재미가 쏠쏠하다.
여하튼 한국에서 온 내가 다자이 오사무의 딸인 오타 하루코 선생님에게서 글을 배운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닌가. 산다는 건 참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