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일상다반사(14)
This is us의 세쌍둥이 중 막내인 랜들에게는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와 키워준 아버지가 있다.
백인 가정에서 위화감을 느끼며 자란 그는 성인이 되어 자신을 소방서 앞에 버린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나를 버렸지만 나는 지금 유능한 인간이 되어 돈도 잘 벌고 잘 살고 있다”고. 그 말만 남기고 돌아가려던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허름한 옷을 입고 병색이 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마음이 좋지 않다. 그래서 자신의 집으로 무작정 모셔간다.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버린 자식이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당황스럽다. 아들이 잘 커서 다행이다. 하지만 부끄럽다. 그 부끄러운 과거를 돌이키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는 아들 집에서 남은 생애를 아들과 관계를 다지는데 쓰기로 한다. 그리고 자신의 손녀들과도 대화를 나눈다. 죽음을 앞둔 그는 할아버지란 직업을 가장 훌륭한(great) 직업이라고 말한다. 많은 할아버지들이 그 역할을 great라고 생각하지 못할 때 대화는 틀어지고 가족관계는 어긋난다.
나에게는 세 명의 할아버지가 있다. 큰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막내 할아버지다.
큰 할아버지는 아빠의 호적상 아버지이며, 작은 할아버지는 아빠의 생물학적 아버지이고, 막내 할아버지는 아빠의 오랜 지원자였다. 나는 아주 어릴 때 큰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고, 초등학생 때는 작은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다. 큰 할아버지는 사업을 해서 항상 바빴고 아들만 특별대우 하는 사람이어서 나랑은 대화도 별로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같이 살았던 작은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작은 할아버지는 일제 시대에 일본에 유학을 했다. 당시 그의 이름은 ‘우시오’였다. 우주를 향한 마음을 품은 남자란 뜻이다. 해방이 되고 할아버지는 군인이 되었다. 그는 꽤나 높은 자리에 있었다. 어쩌면 박정희의 쿠데타에 참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총을 하나 들고 군대를 뛰쳐나왔다. 그리하여 불명예제대를 하게 된다. 그가 총을 들고 민간인을 위협한 일이 뉴스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왜 그랬는지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우리집의 터부였기 때문이다.
나는 작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 그의 이런 에피소드를 몰랐다. 그럼 우리 작은 할아버지가 군인이기 이전으로 돌아가보자. 그는 공부를 잘했고 일본어도 금세 익혔다.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온 후 중매결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마음에 둔 여성이 있었다. 바로 우리 작은 할머니다. 나는 작은 할머니를 많이 닮았다. 당연하다. 우리 아빠의 생물학적 어머니니까. 작은 할머니는 매우 똑똑하고 체구가 작고 날씬하고 얼굴이 갸름했다. 눈이 동그란 미인이었다. 나는 그 눈이 나와 무척 닮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일제 시절에 사금을 발굴해 하루 아침에 갑부가 된 인물이다. 당시 금은광산의 채굴권은 일본인에게만 주어졌다. 그런 가운데 집 앞의 강에서 사금이 발견된 것은 우리 증조할아버지의 인생을 좌우한 크나큰 일이었다. 그야말로 로또에 당첨되는 것, 그 이상의 행운이 작용한 것이다. 사금 발견 후 증조할아버지는 북으로 가 탄광 개발에 나서는데 바로 북에서 만난 어느 가족의 딸이자, 당시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니던 사람이 작은할머니였다.
작은할머니는 증조할아버지 지인의 딸로, 경성에 와서 학교를 다니면서 자주 밥을 먹으러 드나들었던 것 같다. 그 작은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반한 작은 할아버지는 중매 결혼을 거부하고 작은 할머니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 결혼은 작은 할아버지가 불명예제대 후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은 할아버지는 그 후 아무런 직업도 가지지 않았다 또는 못했다. 다만 집안에 돈이 있었기에 별반 어려움 없이 생활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집안에 있는 남편이 아내로서는 반갑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삼시세끼를 차려야 하고 말동무도 되어주어야 했다.
작은 할머니는 우리 식구와 사는 동안 종종 큰딸(우리 고모)이 사는 서울로 내빼곤 했다. 작은 할아버지가 서울에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늘 핑계가 필요했고, 그럴 때마다 작은 할머니는 며느리(우리 엄마)가 자신을 못살게 군다고 거짓말을 했고, 그런 날이면 작은 할아버지는 우리집의 가재도구를 전부 때려부쉈다. 나는 그 시절 작은 할아버지도 작은 할머니도 지긋지긋했고, 결국 작은 할머니가 몇 년 전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모른 척했다.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작은 할머니가 서울로 몰래 나가면 작은 할아버지는 가스불을 켜서 우리 모두를 죽여버리겠다고도 했다. 영화 같다. 그 시절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렇다고 작은 할아버지가 하루 24시간내내 폭력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친절하고 자상했다. 이렇게 쓰면 안 되는 걸까. 하지만 그랬다. 작은 할아버지는 나에게도 존댓말을 쓰셨다. 아이는 존댓말부터 배워야 한다는 게 우리 작은 할아버지의 지론이었다. 나는 그 존대 받는다는 느낌이 좋았다. 예쁜 말을 듣고 예쁘게 크거라. 나는 항상 작은 할아버지 작은 할머니와 같이 잤는데 내가 잠들 때까지 등을 긁어주던 사람도 작은 할아버지였다.
그는 180센티의 장신이었는데 런닝셔츠에 내복바지를 입고, 실크로드 같은 방송을 보면서 내 등을 긁어주었다. 나는 그의 그 큰 손의 느낌을 아직도 기억한다. 까칠했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고 않은 손이었다. 그 작은 할아버지의 손이 나를 키웠고 나는 작은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그 시절 밤마다 내 등을 긁어주던 손의 느낌이 살아난다. 달콤한 커피믹스맛도 떠오른다. 작은 할아버지와 작은 할머니는 커피를 타면 첫 한 모금을 나에게 주셨다. 그 딱 한 스푼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어른이 되면 커피 믹스를 타서 나 혼자 꼭 마시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
작은 할아버지는 걸어다니는 국어사전이라 불렸다. 그는 박학다식했다. 원래 공부를 좋아하고 혼자 글을 쓰기도 하셨다. 초등학생 때 낱말 조사하기 숙제가 나오면 아이들은 참고서를 보고 적어왔는데, 나는 참고서를 사지 않는 우리 집안의 육아 지론 때문에 국어사전을 찾아서 의미를 조사해갔다. 때론 백과사전도 함께 사용했다. 걸어다니는 국어사전인 우리 작은 할아버지가 풀어주는 의미를 그대로 적어서 갈 때도 있었다. 사전을 펴볼 필요도 없이 그는 사전 전체를 다 외우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왜 작가가 되지 않았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조금 그는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직업이 없이 집안의 한량이 된 그가 글을 써서 응모했는데 당선이 되지 않는다면 그의 자존심은 버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작은 할아버지는 대신 매일매일 신문의 낱말맞추기에 정답을 적어, 편지봉투에 넣은 후 우표를 붙여 신문사에 보냈다. 그 정성이 대단했다. 낱말맞추기를 오려내 신문사에 보내면 소정의 선물이 주어지는 시대였다. 하지만 수백통의 낱말맞추기를 보내도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에게 소정의 선물을 준 신문사는 없었다. 이 얼마나 야속한 일인가. 어느 신문사든 그에게 소정의 선물을 주었다면 그는 자신이 쓴 글도 응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큰 키에 어깨가 구부정하고 목소리가 크고 주로 흰 내복을 입고 있던 작은 할아버지. 나는 가끔 그가 그립다. 우리 작은 할머니도 그립다. 같이 살 땐 가끔 지옥같은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럭저럭 사이좋게 보냈다. 다만 우리 엄마는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에게 작은 할아버지와 작은 할머니는 공포의 대상이었을 게 분명하다. 내가 작은 할머니 장례를 찾지 않은 이유는 엄마를 배신하는 느낌이 들어서였는데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면 작은 할머니 묘소를 찾아가 볼까 한다.
인간관계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아빠로서는 최악의 인간이 할아버지로서 조금 나은 인간일 수도 있다. 물론 아빠로서 최악의 인간이 할아버지로서 좋은 인간인 경우는 드물지도 모르지만.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에서 나는 나의 할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하면 좋을지 아직 잘 모르겠다. 매우 좋은 감정과 그를 배반하는 감정이 동시에 작용한다.
그리고 작은 할아버지와 작은 할머니를 떠올리면 왜인지 눈물이 난다.
조금더 다르게 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군대를 탈영한 할아버지가 교사가 되거나 글을 써도 좋았을 것이다.
아니면 할아버지라는 직업을 great하다고 생각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작은 할아버지는 그런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사내로서 태어났으니 큰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잘못된(?) 믿음 때문에 그는 사회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소소하게나마 돈을 벌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사금을 발견해 벼락부자가 되어 지역 사회에 학교를 세우고 큰 인물이 되었다는 것과 비교하면 자신은 매우 작게 느껴져서 도전조차 할 용기가 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This is us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폭력적인 성향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잭은 ‘아버지보다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이 희망이다. 잭의 아들 케빈은 세 쌍둥이와 아내를 위해 헌신한 자신의 아버지처럼 되지 못할까 걱정한다. 결국 케빈의 고민 또한 아버지만큼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잭은 진보적이라기보다 보수적인 남자로 읽힌다. 청소도 하고 요리도 하고 아이도 적극적으로 보지만, 주부는 레베카이며, 레케카가 이 다섯 식구들의 소통의 창구다. 잭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가족들에게 감추고, 가족들을 위해 알콜 중독이 되면서도 일을 하며, 이 가족은 지켜내는 것이 그의 사명이다. 다만 그는 잘 알고 있다.
행복은 크게 한탕하거나 대박을 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평범한 시간을 보내고, 지금 이 순간을 그저 즐기는 것이라는 것을. 너무 크게 보이려고 노력하느니, 아이들과 놀이라도 하나 더 하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 작은 할아버지가 그걸 알고 있었다면 그가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잘난 인간이 되는 것 말고, 소소한 행복을 나누는 것, 그 소중함을 더 많은 사람들이, 특히나 남성들이 알게 되면 시대는 바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