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일상다반사(15)
순간의 선택이 10년의 좌우합니다.
아마 금성의 80년대 광고 문구였을 것이다. 이 문구는 차후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로 더욱 널리 쓰이게 된다.
순간의 선택이 행운으로 가득한 인생을 만들어준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순간의 선택이 불행을 가져오는 경우가 더 부각되게 마련이다.
어제 나는 자칫 잘못해 사기를 당할 뻔했다.
어제는 쉬는날이었고 평소엔 누가 와도 택배가 아니면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는데, 너무 오랜만에 평일에 집에 있다가 순식간에 당한 것이다. 사기꾼들은 상대방의 생각할 시간을 빼앗는다. 불시에 찾아와 공포감을 유발하거나 불안 스위치를 누르고, 공짜로 고쳐주겠다고 한 뒤, 차후 엄청난 금액 또는 희생을 요구한다.
띵동.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검은 옷 차림의 젊은 남자가 “목요일에 옆 아파트 공사를 하게 되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아파트 복도 창문을 모두 열어놓고 공사를 할 것 같아 미리 소음 공지를 하러 나왔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상한 일이다. 대부분의 공사는 적어도 2주 전에는 전단지를 통해 공지한다. 게다가 소속이 가장 중요한 일본 사회에서 그 젊은 남자는 회사 이름도 자기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나는 여간해선 문을 열어주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알겠다”고 대답을 해 버렸고, 남자는 사라졌다.
키는 160쯤 될까. 아주 작은 체구인데 다부지다. 이마에 진 주름이 조폭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어떻게 살면 저런 주름이 저렇게 어린 나이게 생길 수가 있을까. 남자가 사라지고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쿵쿵쿵. 띵동도 아니고 쿵쿵쿵이라니! 남자가 우리집 현관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그는 나와서 확인해야 할 게 있다고 한다. 꼭 들어야하실 것 같다고 덧붙이다. 나는 선의로 해주는 말이라는 것처럼 약간 비굴하게.
“아파트 위에서 보니까 지붕에 나사가 빠진 것 같아요. 주말에도 태풍이 올 텐데 지붕이 날아가면 다칠 수도 있어요.”
다칠 수도 있다니? 누가? 옆집 사람이? 우리 집 앞을 지나가던 사람이?
“우리 선배님이 꼭 전하라고 해서 다시 전한 겁니다.”
“우리집만 그래요? 옆집은요?”
“글쎄요.”
“옆집도 같은 시기에 지어서 수리를 할 때는 항상 같이 하는데요.”
“지붕이란 게 집집마다 닳는 속도가 다르지 않습니까?”
나는 이때 눈치를 챘어야 한다. 아니 그는 초인종을 누른 후 소속을 밝히지 않은 처음부터 미심쩍었고, 작업복을 입지 않았으며 명함이나 전단지 한 장, 연락처가 적힌 어떤 종이 한 장도 들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날로그의 나라 일본답지 못했다.
“그래서 이따 와서 나사만 조여드리고 갈게요.”
“제가 집에 없을 것 같은데.”
“그럼 저녁엔 계신가요?”
“네, 아마도.”
“그럼 저녁에 사다리를 들고 오겠습니다.”
그는 사라졌다. 나에게는 그의 얼굴보다 다부진 몸과 지나치게 패인 미간의 주름만이 남았다. 그리고 이건 어딘가 이상하다는 미묘한 느낌도 함께.
나는 트위터를 열었다. 그리고 일본어로 쳤다. ‘지붕’ ‘사기’.
이럴 수가! 수많은 폭로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얼마전에 우리집에도 와서 지붕을 고쳐준다고 해서 돌려보냈습니다.”
“고향에 사시는 부모님이 당했어요. 무려 60만엔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그 지붕사기단이에요. 사진 첨부합니다.”
“지붕에 올라가면 끝입니다.”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의 일부를 깨버리고 고쳐준다고 하면서 수십 만엔을 요구하는 사기는 이미 전국에 퍼질만큼 퍼져있던 것이다.
나는 당장 옷을 갈아입고 동네 고방(일본식 지구대랄까? 경찰서)으로 찾아갔다. 마침 한 할아버지가 상담중이어서 나는 밖에서 상담을 했다. 아무래도 사기 같은데 우리 주변에 이런 사기가 많습니까? 저녁에 온다고 했으니 방범 좀 잘 부탁드릴게요.
그리고는 곧 남동생에게 연락을 취해 저녁에 우리집으로 와달라고 했고, 초등학교 학부모 모임 라인에 정보를 공유하자, 작년에도 왔었다는 경험담들이 쏟아졌으며, 우리 동네 회장에게도 전화를 걸어 정보를 공유했다. 마을은 내가 지킨다! 까지는 아니지만, 나는 원래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당연히 옆 아파트를 찾아갔다. 일본은 관리인도 경비도 없다. 우편함에 공사 안내가 들어있는지를 확인하고 주민에게 물어보고, 최근 생긴 그 아파트 2층 중국상품점에도 들어가 확인했다. “목요일에 공사해요?” “아뇨”를 제대로 듣고 나왔다.
그리고 지붕 사기단은 저녁에 사다리를 가지고 우리집을 찾아왔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고, 옆 아파트 공사 일정 없다고 하는데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따지지도 않았다. 너무나 무서웠으니까.
“우리집이 아니고 세들어 사는 거라 집주인에게 연락했더니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합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는 좋은 선택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좋은 선택은 주로 물건을 살 때나 유효하다. 그러니까 금성이 전축이나 세탁기를 팔면서 10년의 선택 운운했던 것이겠지.
순간의 선택을 하도록 유도한 후, 최악의 상품을 팔아넘기는 사기단.
나는 너무나 화가 난다. 그리고 이럴 때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동시에 무서워진다. 나이를 먹으면 이런 일은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까 피싱 사기의 피해자의 대부분이 고령자가 아닌가. 사기꾼은 주로 고령자와 주부를 대상으로 사기를 치려고 든다. 그래서 대낮에 남편이 없거나 자식이 없는 시간을 노린다. 어떤 식으로든 나는 복수를 해주고 싶다. 나를 하루 종일 불안하게 만든 정신적 피해 보상도 동시에 받고 싶다. 조금 어리숙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같은 사람들은 쉽게 순간의 선택에서 최악의 경우를 떠안게 된다. 이렇게 악하고 잔인한 사람들은 어떤 순간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세상은 넓고 좋은 사람도 많지만 악한 사람도 많다. 그리고 아무도 악한 사람들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는다. 악한 사람들이 어떻게 약한 사람들을 노리고 침투하는지에 대해. 내가 아베 고보를 좋아하는 건 악한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모습이 있는 그대로, 때론 참혹하게 그려져 있는 탓이 아닐까. 여하튼 일본에 계신 분들을 지붕 사기단에 주의하세요. 사기꾼은 나에게 관심이 없어도 내 돈을 갈취하는 데는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새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