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일상다반사(21)
견딜 수 있을까? 영화관 문을 박차고 도망치지 않을까?
그래서 쉽게 찾지 못한 영화들이 있다.
<겟아웃> <어스>의 제작진이 만든 영화 <안테벨룸>이 그런 영화에 해당한다. 2020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제라드 부시와 크리스토퍼 렌즈가 감독을 맡았고 가수이자 배우인 자넬 모네가 주연을 맡았다. 전세계 17개국 박스 오피스에서 1위를 입증했다는 광고 문구를 달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남북 전쟁이 한창인 시기 흑인 여성 노예 이든은 도망을 치려다 붙잡혀 와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이든은 목화 농장에서 목화솜을 따는 일을 하는데, 이곳은 남부군이 장악한 플렌테이션이며 허락되지 않은 대화는 일절 금지되어 있다. 노예들은 노예들끼리도 절대 대화를 나눌 수 없다.
한편 현 시대의 베로니카는 흑인해방 운동가이며 저명한 작가다. 남편과도 사이가 좋고 딸아이를 키우고 살고 있다. 그런 그녀가 강연을 위해 한 지방도시를 찾는다. 이 지방도시에서 그녀는 철저히 외면 받는데 레스토랑을 예약하면 좋은 자리를 주지 않거나 호텔 방을 청소해주지 않는 등의 소소한 차별이어서 일일이 따지기도 애매하다. 강연이 끝난 후 베로니카는 친구들과 헤어져 호텔로 향하는데 택시 운전사도 그녀의 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노예에게서 말을 빼앗고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모든 침략자들이 해온 행위다. 일본도 조선인들에게서 말을 빼앗고 이름을 빼앗았다. 흑인 차별을 이야기하는 영화지만, 내내 일제강점기를 떠오르게 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온한 기운으로 가득하며, 내내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다. 흑인에게 가해지는 잔인한 폭력. 그리고 여전히 남아있는 차별적인 언행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차별은 어디에나 있고 사람들은 누군가를 차별하는 행위를 통해 쾌락을 느끼고 권력을 갈취하려고 한다. 권력은 원래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하관계를 만들고 차별하는 순간에 태어난다.
흑인들은 어떻게 미국까지 끌려오게 되었을까. 노예상이란 직업은 어떤 것이었을까.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 실상은 사실 잘 알지 못한다.
어디 흑인들의 역사만 그럴까. 제2차 대전 당시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어떻게 끌여왔는지도 개개인의 역사로만 평가될 뿐이다. 게다가 일본에서 그 역사는 완벽하게 부정 당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그랬을 리가 없다 라는 근거도 없는 얘기로 과거사를 부정하려고 한다. 돈이 좋아서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이런 일에 앞장선 인물이 얼마전 피격당한 아베 전 총리이기도 했다.
아베 전 총리가 사망했을 때 재일동포와 교민들은 제발 범인이 한국과 관련이 없기를 두 손 모아 빌었다. 그렇잖아도 혐한이 적지 않은 사회에서 한국인들이 어떤 범죄의 표적이 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1932년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하기 위해 시켰던 ‘주고엔 고짓센(15엔 50전)’발음을 연습 중이라고 했다. 1932년 가을, 주고엔 고짓센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경찰서로 끌려갔고 경찰의 손에서 자경단의 손으로 넘어가 살해당했다. 2022년의 사회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까? 누군가 내게 그 발음을 해보라고 한다면?
분명 1923년보다는 나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혐오와 차별이라는 인간의 내면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범죄가 일어나면 그가 분명 일본국적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부모가 한국 국적이었다는 소문이 돈다. 소문일 뿐이다. 지금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은 미국의 대도시에서 유명한 작가로 사는 베로니카처럼 끌려온 노예는 아니지만, 그들의 후손이거나 먹고 살기 위해 일본을 찾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차별과 혐오라는 다수의 마음 속에 자리하는 이상 그 시절과 똑같은 시절이 또 올지도 모른다는 위험 신고가 담긴 영화다. 한때 한국에서 부랑아라며 사람들을 감금 폭행 학대한 형제복지원 사건이 있었듯 때로는 같은 민족 사이에서도 차별과 혐오는 일어난다. 차별과 혐오를 유구한 역사로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인류는 차별과 혐오를 통해 권력을 잡고 그를 유지해왔다.
영화는 영악하다. 차별은 끝나지 않았고 혐오도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숨쉴 틈을 주지 않고, 그 차별과 혐오가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를 피부로 느끼게 해준다. 어제의 주권자인 내가 오늘은 혐오의 칼날에 쓰러지거나 노예가 될 수도 있다고 위협한다. 그래서 모든 차별과 혐오는 사라져야 할 대상, 아니 규제되어야 할 대상이다. 인류가 후세에 남겨야 할 것은 오로지 관심과 사랑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