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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희 감독의 <수프와 이데올로기>

김민정의 일상다반사(22)

by 김민정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

그런 노래가 있었다. 나를 위로해줄 누군가가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나를 진심으로 위로해주는 사람은 많은 것 같으면서도 많지 않은 것 같기도 하더라.

우선 친구. 나는 단짝을 가져보고 싶어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의외로 부끄러움을 타는 성격인지라 나와 친하게 지내려는 친구의 마음이 나는 좀 부담스러웠고 그걸 표현하는 친구를 보는 것이 어딘지 불편했다.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것이 나에게는 속 편했다. 그래서 가끔 외롭기도 했다.


남자친구, 사귀고 보니 남자친구도 내가 외로울 때마다 항상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은 아니더라.

남편. 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제 경제동반자이자 양육동반자이지 서로의 외로움을 위로해줄 만한 체력과 기력이 부친다.


내가 외로울 때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라는 사실에 당도한다.

내가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책을 제공한다, 영화를 제공한다, 쇼핑을 하게 한다, 운동 가게 만든다 등이 아닐까? 나처럼 평범한 인간이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뿐이다. 마지막으로 맛있는 것을 먹게 한다를 넣을 수 있겠다.


세상은 맛있는 음식으로 넘쳐난다. 인간이 외로움으로 몸부림친다는 사실의 반증이라도 되듯.

김밥, 떡볶이를 소울 푸드로 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그런데 소울 푸드가 하나가 아니란 사실이 더더욱 놀랍다.


만두. 내가 어린 시절, 그러니까 80년대에는 만두피를 팔지 않았다. 우리는 당연히 밀가루 만죽을 했고, 만두피를 만들 재주가 없으니 얇게 편 후 주전자 뚜껑으로 동그라미를 찍어냈다. 반죽은 엄마가 했고, 밀기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의 몫이었고, 나는 주전자 뚜껑 담당이었다. 그렇게 100개건 200개건 만들어서 주로 삶거나 쪄서 먹었다. 국에 넣어 먹기도 했다. 한국에 가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 찐만두집이다. 이렇게 맛있을 수가! 맛을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군만두가 주류인 일본에선 찾을 수 없는 맛이다. 일본인들은 유독 겉은 바삭 속은 보드라운 음식을 먹으며 ‘식감’ 운운하는데 나는 포동포동하게 잘 여물어 한 입 베어물면 김치와 고기가 회오리를 치는 찐만두를 사랑한다.


편육은 또 어떠한가. 누가 고기를 눌러 이런 젤리 같은 식감을 만들어냈느냔 말이다. 이건 집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음식이지만, 내가 어릴 때, 그러니까 또 다시 언급하자면 80년대 우리집에선 직접 해서 먹었다. 군침이 넘어간다.


김치도 마찬가지다. 겨울철에 땅을 파고 묻어두었던 김치를 꺼냈을 때만 맛볼 수 있는 그 신선한 아삭아삭함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맛은 이제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얼마전 재일동포 영화감독 양영희의 <수프와 이데올로기>라는 다큐를 보고 왔다.


솔직담백하게 풀어낸 가족사이다. 양영희 감독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 일본에서 살다가 고향인 제주도로 건너갔다. 그런데 4.3 사건이 터져버린 것이다. 언제 어떻게 참혹한 죽음을 당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동생을 엎고 제주도를 빠져나와 밀항선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다시 일본을 향한다. 지금 말로 하면 그녀는 난민이었다. 한국의 정부를 도저히 믿을 수 없게 된 어머니는 일본에서 같은 민족인 아버지와 결혼했고, 두 사람은 남한 정부를 지지하는 민단이 아니라 북한 정부를 지지하는 조총련에 가입하게 된다.


당시 대부분의 동포들은 조총련에 가입해 있었다. 그들에게 남한은 미국의 개입으로 이뤄진, 게다가 양민을 학살하는 정부였고, 북한은 김일성이 일군 나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하튼 양영희 감독의 부모님은 북한을 믿고 또 믿은 탓에, 북송사업을 통해 아들들을 북한에 보내버린다. 그들은 북한이 지상낙원인 줄 알았고, 북한에 가면 민족차별을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고 일본에서 살기보다 더 여유롭게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며, 북한과 일본을 왕래할 날이 곧 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북한은 지상낙원이 아니었고 자유도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배신을 당했음에도 아들들을 북한에 보내버린 부모는 아들들을 위해 조총련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며 평생 번 돈의 대부분을 북한의 가족들에게 보낸다. 다시는 일본으로 돌아올 수 없는 아들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돈을 보내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사회주의 공산국가에 돈을 보내야 한다니. 사회주의 공산국가의 실태가 이러한 것이었다니.


양영희 감독의 어머니는 딸 양영희의 결혼상대를 위해 닭백숙을 끓인다. 마늘을 셀 두도 없을 만큼 듬뿍 넣고 말이다. 그리고 양영희 감독의 결혼상대는 그 닭백숙 끓이는 방법을 하나하나 배워나간다. 어머니의 음식을 사위가 물려받는 광경은 흐뭇하다. 어머니의 음식솜씨를 딸이 물려받는 것보다 훨씬.


그렇게 수프를 끓이고 또 끓이던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버린다. 겨우 찾아간 4.3기념식인데 어머니는 자신이 살던 고향도 그때 사망한 고향사람들도 잘 기억해내지 못한다. 어머니의 첫사랑이었고 4.3때 사망한 청년의 가족은 4.3은 더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것이 그 일을 겪은 유족들의 진심인 것이다.


고이 고이 끓여낸 수프 한 그릇에는 그들이 살아온 인생이 철학이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가끔 선짓국이나 해장국이 먹고 싶어 도쿄의 한인타운 신오쿠보를 찾곤 한다.

누군가 끓여준 국을 먹고 있으면 아주 잠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엄마가 말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잠들 수는 없다”고.

외로운 시간은 홀로 견뎌야 한다. 인생은 자고로 그런 것이다.

투정을 부릴 필요도 없다. 내가 나를 챙기면 그만이고 챙겨야 한다.

가끔 쇼핑을 하고 멋을 부리고 운동을 하고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고

친구를 만나고 여행을 하고 재밌는 영화를 보고 유익한 책을 읽고

지식을 쌓고 정보를 얻고 수다를 떨고 그렇게 말이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유익해지지만 무거워진다.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배제하면 이번엔 인생이 심심해진다.

그러니 때로는 의미를 부여하고 때로는 의미를 배제하며

나에게 딱 맞을 정도의 무게로 살아가고 싶다.


한 가지 명확한 것은 나는 이제 다시는 우리집에서 직접 만든 편육이나 게장이나

만두나 독에 넣어 땅 밑에 묻어두었다가 익혀서 꺼낸 김장 김치 같은 것을

다시는 먹어보지 못할 것이란 사실이다.

그리하여 오늘은 떡볶이가 내일은 김밥이 모래는 선짓국이

그 다음날에는 갈비가 또는 만두가 또는 게장이 또는 냉면이

우리들의 소울 푸드가 될 것이다.


너무 연연해하지 말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걸어가야지.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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