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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전문 히어로가 필요해

김민정의 일상다만사(40)

by 김민정

얘, 머리카락 떨어졌다.

어디?


고교시절 우리 엄마가 제일 많이 하던 말은 공부하라가 아니라, 머리카락 떨어졌다였던 것 같다. 느낌적으로 그렇다. 도대체 어디에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단 말인가.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엄마는 머리맡에 롤클리너를 두고 사셨다. 툭하면 롤클리너를 들고 나타나, 머리카락이 떨어졌다고 한숨을 쉬셨다. ‘정말 어디에 있단 거야?’ 나는 억울했다. 대학교 1학년까지를 긴 생머리로 지낸 후 숏컷으로 헤어스타일을 바꾼 이유는 개성있게 보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머리카락 떨어졌다는 말을 그만 듣고 싶은 까닭도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그것이 알고싶다 풍으로). 제가 어른이 되어 보니, 머리카락이 여기저기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요. 눈에 뭔가가 쓰인 것일까요?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머리카락이 가장 많은 곳은 욕실 앞이다. 세탁기와 세면대가 있는 그 건식 공간에서 샤워를 한 후 타월로 몸을 닦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린다. 당연지사다. 하루에 세 번 이상 롤클리너로 밀어도 어느샌가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다. 범인은 누구인가. DNA검사를 해야 하나.

그 다음은 부엌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누가 부엌에서 머리를 빗는 것도 아닌데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다. 요리를 할 때 요리용 모자를 쓰는 이유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다. 그 다음은 계단이다. 아니 거기서 수다를 떠는 것도 아니고 10분 이상 체류하는 것도 아니며 정말 한 순간 스쳐가는 그 공간에 대체 왜 머리카락이 있는가. 이불은 또 어떤가. 후우. 롤클리너가 남아날 새가 없고 내 손이 쉴 새가 없다.


그런데 이 머리카락이 왜 내 눈에만 보이는가.

남편이 욕실 앞에서 머리카락을 줍는 일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안 보여? 보이는 해.

왜 안 치워? 내 머리카락도 아니잖아.

뭐라고?

아이들에게 말한다.

머리카락 떨어졌어.

아이들은 대답한다.

어디?


내 고교시절과 같은 반응이다.

엄마, 어디?

어디긴? 집 안 전체지.

한숨이 나온다. 아이들도 같은 반응이다.

남편과 아이들은 엄마인 내가 과민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머리카락은 바퀴벌레의 먹이다. 머리카락만 주워도 집안이 깔끔해 보여서 기분이 산뜻하다. 머리카락이 발에 밟히는 그 느낌도 피하고 싶다. 나는 욕실 부근, 부엌, 각 방마다 롤클리너를 두고 갈 때마다 민다. 대체 거기서 누가 뭘 했다고 롤 클리너가 새까매지는 걸까. 이 머리카락은 어디서 오고 이 먼지들은 어디서 오며 이 시커먼 때는 다 뭐란 말인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카락이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이젠 남의 집에 가도 머리카락이 신경 쓰인다. 그 한 올이 대체 뭐라고 나의 신경을 이렇게 긁느냔 말이다. 나에겐 왜 머리카락이 보이는 능력이 생긴 것일까.


세상에는 수많은 히어로가 있다. 어차피 그들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런데 그들에겐 엄청난 힘이 있어서 지구를 지켜주지만 머리카락을 주워주지는 않는다. 나는 머리카락을 주워주는 히어로를 필요로 한다. 이 수많은 히어로는 다 남자가 만들었나? 그들은 툭하면 싸운다. 도대체 왜? 마치 힘자랑을 하듯 하늘을 날고 적을 때려부순다. 어떤 히어로는 지구를 때려부수기도 한다.


다 됐고 제발 머리카락을 발견하는 능력이 뛰어난 히어로를, 그래서 머리카락을 단숨에 빨아들이는 히어로를 만들어 주세요. 그런 히어로가 나온다면 온지구상의 인간들이 모두 머리카락을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찾아내는 능력을 가지려고 혈안이 되지 않을까요? 설거지를 한 후 그릇을 누구보다도 빨리 정리하는 히어로, 빨래가 마르는 소리를 듣고 누구보다도 먼저 빨래를 걷어서 개고 정리정돈하는 능력이 지구 최고인 히어로, 싸우는 아이들을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떼어놓는 뛰어난 대화능력을 가진 히어로. 정말 필요한 히어로가 얼마나 많은데 툭하면 하늘 위에서 싸움만 해대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때 나는 보던 드라마나 영화의 정지 버튼을 누르게 된다.


청소에도 요령이 있다. 무작정 청소기를 밀면 빨아들이는 입구 솔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여간 고역이 아니다. 엄마는 반드시 먼지 제거 마른 밀대로 바닥을 한 번 민 후에 청소기를 밀었다. 고교 시절 나는 엄마를 ‘귀찮은 인간’이라고 오해했다. 엄마는 공부하란 소리보다 청소를 하란 소리를 더 많이 했다. 심플하게 내가 공부를 잘 해서 공부에 대해 할 말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여하튼 청소에도 엄마만의 룰이 있었는데, 마른 밀대로 민 후에 청소기 밀기(그래야 머리카락이 청소기 안에서 귀찮게 얽히지 않는다), 일어나면 침대 전체를 롤클리너로 청소하기, 부엌은 물걸레질 하기 등이었다.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가 맞았다. 나도 요즘은 꼭 마른 밀대로 머리카락을 다 잡은 후에 청소기를 민다. 훨씬 깨끗하고 청소기 내부 청소도 간단해진다. 롤클리너를 자주 사용하면 청소리를 하루쯤 못 밀어도 어느 정도 청결은 유지된다.


나는 내가 지적하기 전에는 머리카락이 안 보이는 척하고 사는 남편이 밉다.

머리카락이 떨어졌다고 지적해도 정말로 안 보이는 듯한 아이들도 때론 밉다.

머리카락이 툭하면 눈에 들어오는 나도 밉다.

이런 감정이 어느날 터져서 맥주를 한 모금 마시다 눈물이 쏟아지기도 한다. 머리카락이 뭐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카락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서러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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