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일상다반사(46)
가끔 유튜브로 이혼숙려캠프를 본다. 그 출연진들 모두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심리상담에서보다 자기들의 삶을 연극으로 보여주는 상황에서 가장 많이 눈물을 보인다. 자신의 동영상을 보는 것보다 더한 심리적인 압박과 공감과 괴리감을 느끼는 듯 하다. 연극이 이렇게나 유용하다니! 여하튼 그 연극치료는 이 방송 최고의 묘미이다.
결혼한지 곧 20년이 된다. 나는 남편을 대학생 때 만났다. 학창 시절에 일주일쯤 썸을 타기도 했다. 그게 다다. 그리고 나는 후배와 6년을 사귀고 후배가 이웃집 여자와 바람을 피운 후 헤어졌다. 후배의 부모님은 그 아파트의 주인이었고 아파트 1층에는 큰형과 여동생이 살았고 2층에는 내 남친이 후배와 그 둘째형이 살았고 바로 맞은편에는 사촌형제와 그 여자친구가 살고 있었다. 즉 내 남친인 후배는 사촌동생이 오토바이로 전국일주 여행을 하던 중 사촌동생의 여친이자, 밤일을 하는 이웃여자와 바람을 피운 것이다. 문제는 바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신고만 하지 않았지 내가 모르는 사이 종종 바람을 피웠으리라 생각한다. 그렁에도 한 번도 들키지 않았던 건, 내가 둔감했기 떄문이며 그는 절대로 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마지막 바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바람을 피웠다고 당당하게 고백하며 헤어지자고 했다.
나의 6년의 어떤 순수한 그런 연애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결국 그 이웃여자와 보름도 못되어 헤어졌는데, 그건 그 여자가 임신 3개월이 되었기 때문이며, 그 아이의 아빠가 내 남친인 후배가 아니라 사촌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막장 드라마는 아주 순식간에 쓰였다.
나는 언젠가 이 스토리를 글로 쓰려고 했는데 아직 쓰지 못했다.
꼭 그럴듯한 연애물을 써보고 싶다.
나는 얼마나 순수했으며 그는 또 얼마나 순진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헤어진 후 한달 후쯤 그 후배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 둘이 독박쓴 거야."
그는 우리가 헤어진 걸 우리 둘이 독박쓴 거라고 했다.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헤어져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같은 대학을 나온 남편을 우연히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남편은 후배와 달랐는데, 후배는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붙임성이 있고 인기도 많았다.
남편은 사람을 싫어하고 술은 입에도 안 대고 입이 무거웠다.
나는 후배와 전혀 다른 사람과 결혼한 것이다.
그런데 매년 점점 어긋나기 시작했다.
결혼 후 10년은 좋았다. 아니 15년은 좋았다.
우리가 이렇게 무너지기 시작한 건 지난 5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이 사춘기의 그 어려운 일들을 남편은 나에게 다 맡겼다.
자신은 중재역할도 하지 않았고 아이는 남편이 곁에 오는 것조차 싫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는 남편은 자신이 아빠라는 자각을 못했는지 집에 오면 아이를 피하기 시작헀고
이젠 아주 그냥 자기 방에서 안 나오는 중이병 걸린 그런 중년 남자가 되어 버렸다.
내가 애들을 케어하며 운동회며 보호자모임을 다 다녀도 단 한번도 고맙다고 진실되게 말한 적이 없다.
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부끄러워서라며 어쩔 수 없이 진심은 하나도 없이 마치 농담처럼 고맙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부끄러워서 어쩔 수 없이 진심은 하나도 없는 고맙다에 더욱 마음이 상하고
그런 식으로밖에 말하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둔함과 철없음이 이젠 밉기까지 하다.
돌이켜보면 그는 한 번도 스스로 미안하다거나 고맙다고 하지 않았고
아침에 일어나서 먼저 잘잤냐고 하지도 않으며 집에 돌아와 다녀왔다는 인사도 내가 먼저 해야 했다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늘 먼저 인사하고 대화하고 다가가는 사람이다.
어디에서든 그렇다. 나는 그걸 예의라고 배우며 컸다.
그런데 남편은 그런 걸 하는 게 부끄럽다고 한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누군가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것이 부끄럽다니.
남편을 탓하다가 그의 가정 환경을 탓하게 된다. 대체 어떻게 크면 저런 멋없고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걸까 싶다.
하지만 시부모님은 매우 상식적인 분들이시다. 다만, 뭔가 애정 결핍같은 건 있어 보인다.
늘 거리를 두고 살며 우리 애들에게 생일선물 한 번 해준 적이 없다.
설에 가면 세뱃돈은 꼭 챙겨주시지만.
나는 그런 부분에서 정없음을 느끼며 남편도 그런 정없는 사람들 속에서 커서 정이 뭔지 모르고
애정이 오가는 것이라는 것조차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일본에서 <어렸을 때는>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관록이 생긴 양쿠미, 나카마 유키에가 주인공이다. 엄마 나카마 유키에는 딸아이가 스물이 되면 남편과 이혼을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고 전업주부로 살아간다. 아이를 키우는 게 고되고 힘겹지만 나름 행복하며, 아이가 스물이 되면 이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일상에 붙들어 들 수 있는 큰 힘이 된다.
나도 늘 그렇게 생각한다. 아이가 스물이 되면 이 집에서 벗어나리라. 아이들에게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편이란 사람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남편이 있는 집이라는 것처럼 가슴을 무겁게 하는 것도 없다.
나는 끝내 남편을 이해하거나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
나에게 육아를 모두 맡긴 채, 자기는 아이가 자기를 싫어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거실에 앉아 있는 배나온 중년남자, 내가 아이를 다 돌봐도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이나, 운동회에 못 가서 미안하다거나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남자의 무엇을 내가 봐줘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부모복 없는 사람 남편복 없고 남편복 없는 사람 자식복 없다는 말은 나를 너무 힘들게 한다.
복 없어서 나라는 사람으로서 잘 살아내고 싶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나 스스로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자 잘못 만나 섹스해서 애 낳은 죄를 나는 톡톡히 받으며 살고 있다.
부디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잘 부탁한다,
다녀올게, 잘 다녀와, 잘 잤어, 잘 자를
하는 사람으로 모두들 자라서 누군가를 힘겹게 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