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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Jun 10. 2016

정의신의 <이를테면 들에 피는 꽃처럼>

#일본살이|03

'정의신' 3부작 중 하나인 <이를테면 들에 피는 꽃처럼>을 2016년 4월 17일, 도쿄 하츠다이 신국립극장에서 관람했다. 주연을 맡기엔 도모사카 리에의 힘이 약간 부족했지만, 그녀의 연기력과 연기의 폭에 비하면 엄청난 성장이 아닐까. 한 때 10대 여고생 배우로 크나큰 인기를 누리던 그녀가, 이렇게 또 연기로 다시 찾아와주니 반갑고, 연기력이 는 것도 반갑다.


배경은, 한국전쟁 6.25전후의 규슈의 한 항구 마을이다. 주인공은 '캬바레'라 불리는 춤도 추고 술도 마시는 <엠파이어 댄스 홀>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는 '마키'(도모사카 리에)다. 엠파이어 댄스 홀에는 뚱뚱한 호스티스 한 명과, 미모도 재주도 없는 평범한 호스티스 한 명, 그리고 게이인 가게 주인이 있다. 엠파이어 댄스 홀 옆에 <하얀꽃>이란 새로운 캬바레가 생긴다. 생음악 밴드도 있고 젊은 아가씨들이 있는 <하얀꽃>으로 손님들이 몰려들고, 엠파이어 댄스 홀은 사양에 접어 들었다.


마키는 재일동포다. 마키의 남동생은 공산주의에 심취해있고, 북한에 가려고 한다. 마키 남동생 패거리가 <하얀꽃>에 돌을 던진 관계로 <하얀꽃>의 경영자인 '야스오'가 엠파이어 댄스 홀을 찾아오고, 마키에서 첫눈에 반한다. 야스오에겐 결혼을 약속한 여자 '아카네'가 있고, 마키에겐 2차대전에 간 후 영영 돌아오지 않는 연인이 있다. 야스오의 청혼을 거절하는 마키와, 그런 마키에게 질투하는 아카네. 아카네는 야스오가 친동생처럼 여기던 부하를 이용해, 야스오를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전쟁의 상처로 얼굴에 상처를 입은 야스오는, 내내 온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겪는다. 그의 마음에도 큰 상처가 남아있다. 마키는 돌아오지 않는 연인을 기다린다. 마키의 남동생에게 일본은, 규슈의 항구 마을은, 고향이지만 고향이 아닌 곳이다. 일제 치하에서 떨던 세상도, 자본주의에 물들어가는 세상도, 마키의 남동생에겐 지옥처럼 느껴진다.    


도모사카 리에는 주인공을 짊어지기엔 관록이 부족했지만 그럭저럭 볼만했고, 전반적으로 젊은 배우들이어서였는지 캐릭터의 매력이 입체적이지 않다. 야스오를 연기한 야마구치 마키야만 좀 볼만 했다.


정의신 3부작 중 그래도 가장 행복한? 작품이었다.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정의신 3부작의 메시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키는 결국 두 남자를 잃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이 피기만을 기다린다. 봄이 오고, 들에는 꽃이 피고, 여자들이 수다를 떠는 걸로 이 연극은 막을 내린다. 언젠가는 봄이 올 것이라고 정의신은 말한다.


정의신은 1957년 효고현 히메지 출신이다. 윤동주가 다녔던 도시샤 대학을 중퇴하고, 1987년 서른의 나이에 극단 '신주쿠 양산박'의 작가로 취임한다. 택시 기사와 필리핀 여자의 사랑을 그린 '달은 어느쪽에 떴나'로 1993년 기네마준보 각본상을 수상하면서 급부상했고, 1998년에는 '사랑을 구걸하는 사람'으로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했다. 그는 연극계에서도 영화계에서도 스타다. 사회의 밑바닥을 사는 사람들을 그린다. 박민규 작가의 소설과도 어찌보면 상통한다. 정의신은 현실 속의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사람들을 무대 위에서, 스크린 안에서 보여준다. 그리고 늘 똑같은 메시지를 남긴다.


현실을 살아가라고, 어떤 일이 있어도 사는 것이 희망이라고. 그의 연극에 나오는 여성들은 하나같이 강인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제멋대로다.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는다. 언젠가 봄이 오고 꽃이 피고, 그 꽃을 보며 웃는 것은, 늘상 여인들이다.

미국 드라마들은 주로 '결혼'을 매 시즌, 마지막회에 등장시킨다. <위기의 주부>들이 그랬고, <디비어스 메이드>도 그러했으며, 독신 여성들의 일상을 그린, 결코 결혼하진 않을 것 같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섹스 앤 더 시티>조차 영화로 이어지면서 '결혼'으로 끝맺었다.

디즈니도 마찬가지다. 백설공주도 신데렐라도 결혼으로 끝맺어진다. 결혼하지 못한 인어공주에겐 물거품이 되는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

미국식 정의는 결혼과 그 후에 그려지지 않는 행복한, 이 강조된 가정이다. 스위트 홈의 상상만이 남겨진.


정의신은 어떤 의미에서 늘 '가족'을 얘기한다. 결혼 이후의 행복만으로 가득하지만은 않은 남녀와 가족의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질펀하게 담아낸다. 그는 키스 한번에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 삶 따위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결코 행복한 결혼으로 끝맺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슬픈 엔딩도 아닌,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심금을 울린다.


거기 봄이 오고 꽃이 피고 여자들이 수다를 떤다. 그런 일상의 가장 평범한 씬을 가장 행복한 씬으로 승화시킨다. 어쩌면 그가 수많은 캐릭터에게 그토록 힘겨운 수고를 짊어지우는 건, 바로 그 가장 평범한 마지막 씬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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