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바람 Apr 06. 2023

다시 만난 슬램덩크

보수동 책방골목 헌 책방에서...


예나 지금이나 나는 사실 농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공으로 하는 스포츠를 대부분 좋아하고 TV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몸으로 직접 뛰는 것도 좋아하는데 유독 농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과 몇 번 같이 농구대 앞에서 뛰어보기는 했지만 별로 재능도 없었고 내 키로는 도저히 즐거움을 느낄 만큼의 매력을 갖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슬램덩크라는 만화가 열풍을 일으킬 때에도 그 만화책 전편을 다 읽지는 않았다. 친구들이 빌려온 것을 띄엄띄엄 본것이 전부였다. 


꽤 오래 전 부산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카메라를 들쳐 메고 부산의 국제시장과 깡통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유명하다는 길거리 음식과 간식들로 요기도 하면서 남포동의 시장바닥을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가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길을 잡고 천천히 걸어갔다. 책방거리임을 알리는 입구에서부터 이 곳이 오래된 역사를 가진 곳임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좁은 골목길 양쪽으로 꽤나 많은 서점들이 줄지어 서있었고 문 밖까지 책들이 쌓여있는 모습이었다. 대부분 중고서적을 다루는 헌 책방들이었다. 주욱 걸어가다가 마음이 끌리는 대로 몇 개의 서점을 들어가보기도 했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통로 양쪽으로 수많은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었고 바닥부터 차근차근히 쌓아 올려져 있기도 했다. 시리즈로 나온 책들은 전집을 맞춰 노끈으로 묶어놓기도 했다. 눈에 들어오는 책들을 펼쳐보면 대부분 1900년대 후반에 인쇄된 책들이었다. 물론 간혹 고서점들에는 훨씬 오래된 책들도 있었다. 확실한 것은 새로운 책들보다 예전에 읽었던 혹은 관심이 많이 갔던 추억의 책들에 눈이 갔다는 점이다. 어릴 적 기억 어딘가쯤에 저장되어 있던 책들의 표지와 제목들이 생생히 되살아나며 내 손을 이끌었다. 


그러다가 슬램덩크 만화책을 발견했다. 

  한 때를 풍미했던 만화책 "슬램덩크"! 워낙 많이 유명해서 많이 인쇄한 책이라 발간된 시기가 달랐는지, 아니면 원래 책 주인들의 보관 상태가 달랐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색이 바랜 정도가 제각기 다른 슬램덩크 만화책들이 노끈에 묶여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었다. 마치 제각기 태어나 제각기 다른 삶을 살며 자라오다가 학교에서 한 반으로 묶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학창 시절의 우리들 모습처럼 그 만화책들은 제 나름대로의 빛을 내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 때의 즐거웠던 기억들과 연결이 되었다. 1990년 초를 풍미했던 슬램덩크의 인기는 당시의 농구열풍과 함께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들썩거리게 했었다. 농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 역시 많은 친구들이 농구장에서만 놀고 있던 탓에 몇 번 공을 들고 뛰어다닐 정도였다. 심지어 군대에서마저 족구와 축구를 밀어내고 농구를 하는 인원들이 늘어나기까지 했으니 그 인기는 상당했다고 할 만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대부분의 인기라는 것이 그렇지만) 서서히 열풍이 시들어가기 시작하더니 기억 속 어느 서랍 안으로 조용히 들어앉아 잊혀져 갔다.


최근에 슬램덩크 영화가 또 대박을 터트렸다고 한다. 

  다시 열풍이 불었다. 미디어에 자꾸 이런저런 방식으로 소개가 되고 심지어 뉴스에 등장할 만큼 영화는 대박을 터트렸다. 한 번 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그 영화를 보지는 않았다. 영화를 먼저 본 사람에게 대략의 이야기를 물었는데 만화책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조금은 다른 내용으로 충분히 재미있게 구성되었다고 했다.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슬램덩크"라는 그 제목만으로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했다. 비록 청소년기에 그 만화를 다 읽지는 않았지만 대충의 내용만으로도 친구들과 충분히 대화가 되었다. 친구들은 농구를 하면서 현실판 강백호가 누구인지, 채치수가 누구인지, 서태웅은 누구인지를 치열하게 토론(?)했고, 그러면 채소연은 누구냐며 깔깔대며 웃기도 했었다. 슬램덩크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그렇게 과거의 추억과 쉽게 연결되었다. 목소리도 없이 글자로만 적혀있는 대사들과 움직임이 없이 2차원적으로만 그려진 그림으로만 된 만화였지만, 어린 시절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림이 살아움직이게 하고 그 인물의 입을 통해 멋드러진 대사들이 음성처럼 들리게 했던 그때의 기억들은 추억이 되어 영화가 아닌 그 만화책에 고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어쩌면 영화를 보지 않은 이유가 이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상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농구부 애들의 모습을 굳이 누군가 만들어놓은 영상으로 확인받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다. 조금 더 솔직하게는 내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그들의 모습이 실제 영상에서는 그 정도가 아니면 어쩌나, 혹시 내 상상과 달라 어긋나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아쉬움을 남길까 걱정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추억은 실제가 아니라 상상으로 남아있을 때 더 추억다운 것이니까.


최근 보수동 책방골목이 위태롭다고 한다.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점점 고서적 책방, 중고서적 책방들이 하나씩 하나씩 운영난으로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곳 책방골목은 여전히 쓸모있게 다뤄지는 오래된 책들과 함께 지난 시절의 상상과 추억을 다시금 찾아낼 수 있는 공간일 수 있는데, 그런 공간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은 그저 또 아쉽고 씁쓸할 뿐이다. 머리 속 (이제는 꽤 오래 되어 낡아 버린) 기억의 서랍 속, 넣어놓은 줄조차도 까맣게 잊었던 추억을 다시 환기해줄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무척이나 안타깝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변화하는 세태에 따라 추억이 쌓이는 공간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안타까움 속에서도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해본다. 


왜냐하면 지금도 어디엔가 추억은 고이 쌓이고 있을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서쪽부터 밝아오는 하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