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을 먹고 짐을 챙겨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딱시부 기사 ㄹ~레이(Rey)가 우리를 맞이했다. 차는 그대로인데 기사가 바뀌어 있었다. 이곳으로 올 때는 나이가 좀 있어보이는 아저씨 훌리오였는데 새로 온 ㄹ~레이(이름을 물었을 때 그는 R발음을 아주 강조하며 ‘ㄹ~레이’라고 했다. 절대 그냥 ‘레이’는 아니라며~ ㅋㅋ)는 선글라스가 멋지게 어울리는 젊은 사람이었다. 9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이미 다른 일행들은 서둘러 체크아웃을 하고 딱시부에 짐을 싣고 있었고 시간에 맞춰 나온 대박님과 나는 방에서 나오다가 그런 일행을 보고 부랴부랴 딱시부로 가서 짐을 싣고 몸도 실었다. 이내 딱시부는 ‘씨엔푸에고스(Cienfuegos)’로 출발했다. 씨엔푸에고스(Cienfuegos)는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역사지구이다. 19세기 초 스페인 식민 도시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원래 처음 지어질 때의 이름은 '페르난디나 데 하구아'였으나 1825년 폭풍으로 파괴된 도시를 재건한 스페인 장군 씨엔푸에고스(Cienfuegos)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지명으로 쓰고 있다고 했다. 아이러니였다. 내 머릿속에 씨엔푸에고스(Cienfuegos)는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의 3대 혁명가로 불리는 카밀로 씨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 밖에 없는데... 그래서 이 도시의 이름도 혁명가의 이름을 딴 것으로 알았는데 점령군 장군의 이름이었다니~!
딱시부의 새로운 운전자 ㄹ~레이는 우리를 씨엔푸에고스로 데려다주고 있다.
어제 우리 일행은 필리페와의 통화를 통해 오늘 아바나로 바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가는 길에 있는 씨엔푸에고스에 잠시 들렀다 가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원래 우리의 사전 일정에는 없었던 곳이지만 이렇게 딱시부를 빌려 이용하다보니 보너스로 얻게된 일정이었다. 자동차를 이용하는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우리 일행들은 다음 여행 때는 아예 우리가 렌터카를 빌려서 다니는 것을 어떨까 하는 위험한(?) 상상을 하며 진지하게 얘기해보기도 했다.(실제로 몇 년 뒤 그런 일이 일어났다~^^)
산타끌라라를 거쳐 뜨리니다드로 올 때도 많이 보았지만 쿠바 들판에는 역시 사탕수수가 참 많았다. 전 세계 생산량의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하는 얘기가 맞겠다 싶을 정도였다. 물론 겨울이라(계절이 이곳에선 의미가 있을까 싶다. 적도 부근이니까~) 이미 수확해 빈 터로 남겨진 부분도 많았지만 아직도 곧게 뻗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크고 작은 사탕수수밭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운데 푸르른 모습이 사탕수수이다. 사실 대평원에 가득 심어진 사탕수수도 많이 보았지만 사진에 담진 못했다.
도로에는 역시 올드카와 신형차, 마차와 자전거들이 함께 뒤섞여 있는 모습들이 보였고, 말똥의 추억(?)을 갖고 있던 총무님은 저 마차들 때문에 도로가 굉장히 더러울 것 같은데 깨끗하다며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시골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공주 도시남인 총무님은 모를 만도 했다. 경험이 있는 다수의 일행들이 자세히 보면 말똥을 받아내는 똥받이가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고 총무님은 마차들을 추월해 나갈 때 그것을 확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2시간 조금 못되는 시간을 달려 씨엔푸에고스로 가는 길에는 마차가 참 많이도 보였다. 대부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침 밥을 먹고 일터로 나가는 길로 보였지만 군데군데 마차로 택시 영업을 하는 이들도 보였다. 우리나라에선 도통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이들 나름대로의 생활 방식이었다. 오히려 이런 모습은 도시에서만 살아가는 현대인, 도시인들에게는 생경한 풍경으로 호기심을 가질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바는 이렇게 지난 몇 십년 간의 인류 문명을 동시간대 같은 공간에 풀어놓는 매력이 있는 나라라는 생각이 다시 한 번 깊게 들었다.
씨엔푸에고스에 가까워질수록 유독 마차가 많이 보였다. 심지어 마차로 택시영업을 하기도 한다(오른쪽)
쿠바 도로의 흔항 풍경. 올드카와 뉴카, 자전거와 마차가 공존한다.
씨엔푸에고스에 거의 다다를 무렵, 광고판 하나가 눈에 딱 띄었다. 팔뚝에 쿠바 글씨가 새겨진 주먹 하나가 성조기 문양의 모자를 쓰고 있는 미국인을 힘차게 때리는 그림이 그려진 광고판이었다. 미국의 압박을 온 몸으로 견뎌낸 쿠바인들의 자존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미국과 다시 국교 정상화가 되었지만 아직 쿠바에게 미국은 적성국으로 남아 있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되었다. 사실 이 당시 쿠바에서는 영어도 달러도 잘 통하지 않았다. 이런 점이 그간 미국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웃 나라와 현대사에서 적대적 관계를 갖고 있었고 그로 인한 정서적, 사회적, 경제적 피해는 국가 차원의 문제이기 이전에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일제시대가 그러했고 현재도 진행중인 남북대치가 그렇다. 쿠바 사람들의 이런 자존심과 자부심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오히려 멋있게 보였다! 쿠바 파이팅~!!!
해학에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표지판이었다. 그들의 자존심과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200여년을 유지해 온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계획도시
11시쯤 우리는 씨엔푸에고스의 ‘호세 마르띠 공원(Parque Jose Martí)’에 도착했다. 공원 중앙에 키 높은 야자수와 함께 쿠바 국기가 펄럭이고 있고 그 옆으로 호세 마르띠의 동상이 한 팔을 앞으로 펼쳐보이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쿠바 사람들의 자긍심을 보여줄 만큼 그 동상이 풍기는 인상은 자신감 넘치면서도 근엄한 포스를 드러내고 있었다. 쿠바 독립을 이끈 문학가이자 혁명가였던 그는 1895년 제2차 독립전쟁에서 전사하였고, 이를 계기로 쿠바인들의 독립 투쟁 의지가 높아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끝내 독립 전쟁에서 승리하였기에 그에 대한 쿠바인들의 사랑은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존경심만큼이나 깊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그를 기리고 기념하고는 조형물과 공원 등은 쿠바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식민 계획 도시의 심장부인 이곳 한 가운데 그의 동상이 서있다는 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으리라. 호세 마르띠의 동상 옆으로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작은 돔(우리로 치면 공원에 있는 정자쯤 되어 보인다)이 있고, 더운 날씨를 달래줄 작은 분수대도 있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여행객들뿐만 아니라 이곳 사람들이 산책을 나온 경우도 많아 보였다.
호세 마르띠 광장의 모습.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만큼 쿠바의 여러 도시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한 쪽 공터에는 세계 어느 곳 광장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비둘기들이 있었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어린 아이들이 새들을 쫓아대며 놀고 있었다. 역사적 인물들의 희생 끝에 만들어진 현재의 시간에 새로운 인물들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자라나고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뭇한 미소를 자연스레 띠게 하는 여유로운 풍경이었다.
비둘기를 좇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행복한 한 때가 보는 이들에게도 미소짓게 한다.
광장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형형색색의 산뜻한 색을 칠한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꽤 큰 갈색의 돔과 함께 국기를 펄럭이는 주청사(palacio de gobierno)가 가장 선명하게 먼저 눈에 들어왔고, 높은 종탑이 보이는 까떼드랄 누에스뜨라 세뇨라(Catedral Nuestra Señora, 성모대성당)도 멋있었다. 극장과 박물관도 주변에 들어서 있었는데 이 모든 건물들의 공통점은 겉면 색깔이 파스텔톤의 화려함을 자랑하듯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1800년대 초 스페인 점령기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계획도시로 만들어진 도시 구조가 큰 변화 없이 옛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모습이 그대로 잘 드러나는 풍경이었다.
주 청사(palacio de gobierno)의 모습.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고. 주변에 사람과 차도 많아 이곳이 씨엔푸에고스의 중심지임을 알린다.
개선문(Arco de Triunfo)(왼쪽). 최근에 다시 칠한 것처럼 색깔을 예쁘게 잘 칠해 놓았다. 다른 도시들과 달리 예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중심부의 화려함과 뒷골목의 고단함
주변을 둘러보다 우리 일행은 이층 건물 위에 전망탑이 있는 건물에 사람들이 꽤나 드나들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옥상에 있는 전망탑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는 여행자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도 들어가 보기로 했다. ‘까사 데 라 꿀뚜랄(Casa de la Cultura Benjamin Duarte)’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건물이었고 1층 출입구에서 입장료를 받는 곳이었다.
까사 데 라 꿀뚜랄(Casa de la Cultura Benjamin Duarte). 왼쪽 위의 전망대에 올라가면 광장 주변과 시내 전경이 보인다.
겉면의 화려함과 달리 안의 모습은 허름해보였다. 계단을 오르는데 곳곳에 칠이 벗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런 건물들은 최소 60년, 길게는 200년 이상 된 것들임을 생각하면 그 당시의 화려한 번영, 혹은 아픔의 역사를 이 건물들이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올라가 본 내부의 모습은 당시의 화려함을 충분히 떠올릴 만 했다. 벽과 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타일의 고급스런 문양과 아치형으로 만들어놓은 문의 모습들이 충분히 화려하였고 무엇보다 이층 옥상 위로 솟은 전망탑의 모습은 가까이서 보아도 충분한 감탄을 자아낼 만했다.
외관과 달리 갓 들어섰을 때에는 이게 뭔가... 싶을 정도로 페인트가 벗겨져 있는 등 허름한 모습이다.
하지만 타일로 되어 있는 부분들(왼쪽)이나 당시의 가구나 창문의 모습(오른쪽)은 오랜 시간이 무색할 만큼 화려하고 멋진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옥상에 올라 호세 마르띠 광장과 주변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항구도시인 만큼 가까운 곳에 바다가 금방 보였고 멀리는 공업단지인 듯 큰 굴뚝도 두 개나 보였다. 화려해 보이는 광장의 모습의 반대편으로는 이곳 사람들의 삶터가 속살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확실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관공서나 성당 등이 모여있는 중심부를 제외한 곳은 쿠바의 다른 도시에서 본 보통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중심부의 화려함이 너무 돋보인 탓에 상대적으로 더 대비가 되어 보였다. 아마도 스페인 식민 시절에도 이러했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이곳에서 목축업과 함께 사탕수수, 망고, 담배, 커피 등을 집중적으로 생산하여 저 멀리 보이는 항구를 통해 스페인으로 실어 날랐을 것이었다. 어쩐지 그때의 그 고단함이 지금의 이 곳 사람들의 모습에서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사람들의 모습.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위)과 광장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아래)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주 청사 앞의 모습. 펄럭이는 깃발 아래로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걸어다닌다.
전망대에서 호세 마르띠 공원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나오는 풍경들. 멀리 바다와 항구, 공장이 보이고 이 지역 거주지가 보인다.
전망탑에 올라보기로 했다. 그리 튼튼해보이지 않는 철제 계단이 나선형으로 되어 있고 그곳을 하나씩 밟아 중간쯤 올라갔다. 너댓명이면 비좁아 보이는 그곳에서는 주변 풍경이 더 시원하게 내려다 보였다. 거기서 더 좁은 철제 계단을 올라가면 전망탑 맨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이 까사 출입구에서 표를 팔던 안내 아주머니가 한명씩밖에 올라갈 수 없다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계단은 무척 좁았고 발을 디딜 때마다 철제 계단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언제 부서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다 오른 후에는 화악 펼쳐지는 시원함이 오른 이를 맞았고 한 편으로 다가온 그 고소공포가 그 시원함을 배가시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오른 이를 아래에서 바라보는 것은 한편의 그림이 되기에 충분했다. 내려오고 나서 이층 옥상에서 전망탑에 오른 한 여행객 커플을 사진에 담아보았다. 역시 멋진 그림이 되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곳이 쿠바가 아니라 유럽인 듯한 느낌이 자꾸 들었다.
전망대 오른 사람들의 모습. 그저 한 폭의 그림이 될 만하다. 파아란 하늘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까사에서 나와 잠시 공원 벤치에 앉아 휴식을 즐겼다. 표면을 매끈하게 잘 정비한 올드카들이 이곳에서도 여행객들을 태워나르고 있었다. 도심부는 역시 매끈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심지어 올드카마저도....
올드카 택시들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여행객들이 기사와 흥정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야구의 나라를 직접 만나보자~
야시엘 푸이그(사진출처 : MK스포츠)
우리는 다시 딱시부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9월 5일 야구장(Estadio 5 de Septiembre)’에 찾아가 보기로 한 것이다. 야구의 나라 쿠바에서 야구장을 한번 찾아가 보기로 한 것이다. 이 경기장은 이곳 씨엔푸에고스를 연고로 하는 ‘씨엔푸에고스 엘레판떼스’의 홈구장이다. 류현진과 함께 메이저리그 LA다저스에서 선수생활을 했고, 최근에 국내 야구단과 계약해 내년에는 우리 프로야구 리그에서 만날 수 있게 된 ‘야시엘 푸이그(Yasiel Puig)’가 쿠바에 있을 때 뛰었던 구장이기도 하다. 그는 이곳 씨엔푸에고스 출신이고 쿠바 대표팀으로도 뛰었지만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하기 위해 망명을 시도하다 몇 차례 실패했었고 결국 2012년 탈출에 성공해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들어갔다. 당시 쿠바 출신 선수 역사상 최고액의 계약을 했고 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이곳 쿠바 젊은이들에게, 특히 야구를 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우상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국제 대회에 참가하는 쿠바 선수들 중 일부는 밀입국을 시도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고 한다.
출발한 지 5분만에 야구장에 도착했다. 경기가 없던 날이었기 때문에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근처에 도착해서 역시 우리의 딱시부 선글라스 기사 ㄹ~레이가 현지인들에게 물어 입구를 찾고 그 앞에 차를 세워주었다. 내야와 외야의 경계 쪽에 있는 출입구를 통해 야구장 내부로 들어갔다. 아주 커 보이지는 않는 규모의 야구장이지만 천연 잔디가 깔려 푸른 빛이 선명하고 관리가 아주 잘 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9월 5일 야구장(Estadio 5 de Septiembre)’의 모습. 작지만 예쁘고 관리가 잘되어 있다. 역시 쿠바는 야구의 나라~!
3루측 내야 관중석을 걸어 포수 뒤쪽 관중석 쪽으로 다가가니 현지인들이 몇 있었다.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South Korea를 말했더니 금세 친하게 다가왔다. 이미 올림픽이나 최근의 프리미어12에서도 시합을 한 적이 있어 금방 알아보았다. 다만 걱정스러웠던 점은 그 두 경기 모두 쿠바가 우리나라에 패했기 때문에 혹시나...... 했지만 그건 기우였다.
포수 뒤쪽 본부석 쪽에 몇몇 현지인들이 앉아 있다. 구단 관계자인지 팬들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야구 열정은 최고였다.
이내 밝은 미소와 하이톤으로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실컷 하기 시작했다. 이어 그 중 한 남자가 야구모자나 유니폼에 대해 이것 저것을 말하더니 1층으로 갔다오면서 이곳 팀의 모자와 유니폼을 꺼내놓았다. 기념으로 사라는 것인데 그것은 마다하고 그냥 내려왔다. 출입구를 빠져나가려는데 역시나 이곳에서도 팁을 요구했다. 하지만 우리는 팁 대신에 가방에 있던 사탕, 초코바를 주고 빠져나왔다. 그곳 출입구를 통해 나왔더니 야구장 밖에 거대한 코끼리 상이 서 있었다. 이 곳 팀의 상징이다.
야구장이라고 하면 관중의 함성과 선수들의 치열한 플레이가 있어야 하는데 텅 빈 야구장만 보고 나오니 무언가 쓸쓸함과 아쉬움이 컸다. 자꾸 쿠바를 떠나려는 젊은 세대들이 떠올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야구장 바깥의 코끼리 상.
이질적 문화의 융합이 담긴 그곳으로~
야구장 구경을 마치고 다시 5분여를 달려 ‘바예저택(Palacio de Valle)’으로 갔다. 씨엔푸에고스 남쪽 끝 바다로 튀어나온 작은 반도의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바다를 맞닿은 저택 뒤편에 우리를 내려주고 ㄹ~레이는 차를 돌려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바다를 뒤로하고 멀찍이서 건물을 바라보며 감탄을 하고 있었는데 교복으로 보이는 옷을 단체로 입은 학생들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대학생은 아니리라~. 여학생들의 치마가 무척 짧았는데 한국에서 저렇게 교복을 입고 다니면 당장에 짤릴 것이라며 농담을 했다. 하지만 그런 자유분방함이 또한 이곳의 매력이 아니겠나 싶었다. 어쩌면 우리 문화가 너무 경직되어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편 그 자유분방함이 부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다쪽에서 바라본 바예 저택. 그 앞으로 학생들이 지나가고 있다.
건물을 돌아 앞쪽으로 갔다. 뒤쪽도 그랬지만 앞쪽은 화려함이 더했다. 무엇보다 디테일이 살아있는 아랍풍의 정교한 문양들이 쉴 새 없이 이어져 있어 그 화려함을 더했다. 지금은 안에서 레스토랑과 테라스 바로 운영되고 있지만 원래는 지역에서 설탕산업으로 큰 부를 누렸던 스페인 출신 아시스클로 델 바예 블랑코(Acisclo del Valle Blanco)라는 이가 신부를 위해 결혼 선물로 지었다는 궁전이다. 당시 모로코,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 장인들을 불러 이슬람 건축양식인 무리시(Moorish)를 바탕으로 여러 건축양식을 혼합해 5년만에 지어낸 건물이라고 한다. 지어진 지 100년쯤 된 건물인데 별다른 보수 없이 그때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겉에서 바라볼 때부터 특이하면서도 화려한 문양이 한 눈 가득 들어왔고 기둥 끝마다 기하학적 문양이 쉼없이 이어져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직선이나 곡선 형태를 그대로 두지 않고 화려함으로 중무장을 한 모습이었다. 다양한 건축양식들이 혼합되어 독특한 멋을 만들어내는 모습이었다. 융합과 조화에 겁내지 않고 그것을 예술로 완성해내는 쿠바의 문화가 돋보였다.
입구 쪽에서 바라본 바예 저택. 여러 건축양식이 혼재되어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내부의 화려함은 더욱 뛰어났다. 천정에 창을 감싸고 있는 금색 문양들은 지금까지 보았던 쿠바의 그 어떤 건물들의 문양보다 화려하고 정교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대리석으로 조각한 듯한 한 남자의 상(나중에 알고보니 이 저택의 원래 주인이었던 바예의 모습이었다)이 서있는데 아마도 원래 이 저택의 주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계단을 올랐다. 계단 난간의 조각들과 2층 창의 스테인드글라스, 천정에 달린 조명 등은 원래 집 주인의 품격을 한껏 높이기라도 하려는 듯이 마음껏 뽐을 내고 있었다. 궁전이라 불리는 이 저택이 보여주는 극강의 화려함은 100여년 전 쿠바는 결코 가난하지 않았으며 꽤나 부유함을 누리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 부유함이 일부 식민 지배자들에게만 국한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적어도 지금의 쿠바의 가난함은 최근 들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더 컸다. 냉전 시대에 이념의 전쟁 끝에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강력한 봉쇄 때문에 발생한 가난함이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러니 쿠바는 언제든 다시 부유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앞 정원의 야자수들이 건물 높이만큼이나 크게 자라 있었다. 지금 이 저택의 주인은 누구일까, 아마도 레스토랑의 주인이지 않을까 싶은데... 이 정도면 그냥 문화재(?)로서도 관람객을 유치할 수도 있을텐데 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걸까, 역사의 흔적으로도 건축예술의 측면에서도 보존 가치가 충분해 보이는데 굳이 왜... 하는 의문과 아쉬움들이 끝끝내 머리속에 남은 채 저택을 빠져 나왔다.
바예 저택의 내부. 황금색 치장들이 가는 곳마다 펼쳐져 있다. 오른쪽은 바예의 조각상.
쿠바의 흔한 식사, 그리고 방파제 데이트~
말레꽁 옆 도로를 시원스레 달려 약 5분 만에 점심을 해결할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여행책자에도 소개되어 있을 만큼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피자를 먹을 수 있는 ‘Dino's Pizza’다. 간단 스페인어 통역사인 직진님이 역시 가이드 도움을 주는 ㄹ~레이의 도움을 받아 주문을 했다. 또한 역시나 주문 후에는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그 시간을 그냥 기다릴 수 없어 카메라를 들고 방파제(말레꽁)을 향해 갔다. 도로를 질주하는 자전거와 오토바이, 자동차들 옆으로 줄지어 야자수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고 야자수 옆으로 난 인도에는 적당한 높이의 방파제가 주욱 이어져 있다. 바다와 함께 멋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이런 말레꽁에는 당연히 데이트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아무리 한낮 점심 때라고 하지만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의 모습이 없지는 않다. 방파제에 걸터 앉아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젊은 연인의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불현듯 제주시 한복판 바닷가에 있는 탑동 방파제와 광장이 떠올랐다. 파도소리에 은밀한 자기들의 이야기를 묻으며 짝지어 걷고, 한쪽에선 피끓는 젊음들이 농구 등을 하며 바다만큼이나 푸른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는 그곳! 흐뭇한 미소를 띠며 자리로 돌아왔다. 젊음은 그 자체로 늘 아름답다.
씨엔푸에고스의 말레꽁. 아바나보다 훨씬 정갈하고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방파제에 나란히 앉은 커플이 예쁘다.
식사가 나왔다. 파스타와 피자가 나왔는데 다른 곳들의 음식과는 달리 여기의 파스타는 짜지 않고 슴슴한 맛이었다. 반면 피자는 향과 맛이 강해 둘을 섞어서 함께 먹어야 제 맛이 났다. 더운 날씨에 시원한 청량 음료가 속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식사를 하면서 가는 길에 꼬히마르를 들러서 가는 게 어떻냐는 의견이 나왔다. ㄹ~레이에게 10쿡 정도를 더 주고 헤밍웨이를 만나고 가자는 것이었다. 어차피 아바나에서 나올 때도 그 이상의 택시비가 드니까 가는 길에 보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서 또 일정을 변경해보는 것이었다. 자유여행이니까!! ㄹ~레이에게 얘기를 했더니 많이 돌아가야 한다며 40쿡을 요구했다. 잠시 고민했지만 이번 여행에서 이런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의 결정은 늘 긍정적인 쪽으로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그런 행운을 믿고 40쿡을 과감히 지불하기로 했다. 사실 이곳 씨엔푸에고스도 우리가 딱시부를 빌리기로 한 결정 때문에 덤으로 얻게 된 여행지가 아닌가~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식당의 실내를 놔두고(나중에 화장실 갈 때 알았다. 살짝 억울했다ㅋㅋ) 더운 테라스에서의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 2시가 거의 다 되어서 꼬히마르로 출발했다.
엊그제 보았던 체 게바라와 혁명의 도시 산타끌라라에 대한 생각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에서 역사의 도시 씨엔푸에고스까지 만나고 나니 굴곡진 역사와 그 시대를 헤쳐 나온 이들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많이 비교가 되었다. 우리의 식민 시절에 그 상황에 맞써 싸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우리의 모습은 체 게바라나 카밀로 씨엔푸에고스, 호세 마르띠를 기리는 이들의 모습만큼 충분한가 하는 반성이 들었다. 그리고 피폐한 현실에서 버티며 살아온 우리 앞선 세대들에 대해서는 어떤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뚜렷한 결론을 내기보다는 그런 생각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자기 위안을 하며 꼬히마르로 가는 딱시부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