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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바람 Jul 03. 2024

사연을 담는 버스

싱가포르의 194번 버스에서 만난 장면


싱가포르에서 버스를 탔다.

참 오래 전 일이다. 2010년 1월, 싱가포르 여행을 갔었다. 그 작디 작은 도시 국가에 오밀조밀 볼거리들이 여럿 있었고 그 중 주롱 새공원을 찾아가기로 했다. 숙소가 있는 마리나 베이에서 주롱 새공원을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야 했다. 아침을 느긋하게 챙겨먹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터미널로 가서 194번 버스를 탔다.(지금은 주롱 새공원이 없어졌다. 2023년에 폐업을 하고 싱가포르 동물원 옆으로 이전해서 그해 5월에 버드 파라다이스라는 이름으로 재개장했다고 한다. 그러니 194번 버스를 탈 일도 없어졌다.) 


어딘가 허름한 194번 버스

싱가포르라는 나라의 이미지와 비교하면 그 버스는 조금은 낙후되고 초라한 느낌이었다. 2층 버스이긴 하지만 타기 전부터 느껴지는 버스의 겉면이 주는 느낌은 어느 시골 외곽의 시외버스 같은 느낌이었다. 여러번 덧칠한 듯한 페인트와 군데군데 아귀가 맞지 않는 듯한 문짝과 철판들이 무척이나 현대적일 것 같은(그래도 지하철에서는 그런 느낌이었는데) 싱가포르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버스를 타는 사람들

버스를 타고 주롱 새공원까지 가는 시간동안 그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꽤 있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와 같은 관광객들은 이 버스를 영 타고 다니질 않았는지 오히려 버스를 타고 내리는 현지인들이 낯선 이방인인 우리를 자꾸 쳐다보곤 했다. 하여튼 이 버스는 그야말로 서민의 버스였다. 버스를 이용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출퇴근과 일상 생활을 위해 나선 현지인들이었다. 그야말로 이 버스는 현지인들의 생활이, 그들 각자의 사연이 담뿍 담긴 그런 버스였다. 그러다 내 앞자리에 어떤 사내가 툭~하고 의자에 몸을 내던지듯 앉았고 이내 다리를 꼬고 앉아 등받이에 몸을 맡겼다. 슬리퍼를 벗어난 오른쪽 맨발이 왼쪽 무릎 위로 올라왔다. 


맨발, 그리고 금반지

잠시간 머뭇대던 나는 조용히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찰칵 하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만큼 버스의 소음은 심했다. 사각의 프레임에 담긴 이 사진이 주는 메시지는 무언가 묵직했다. 왼손 약지에 결혼 반지로 보이는 금반지가 끼워져있는 이 아저씨는 더위를 대비한 듯 헐렁한 남방을 깨끗이 차려 입고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것이 마음에 스며들어 여행이 다 끝난 후에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만큼의 무게감이었다. 끝내 이 사진은 싱가포르 여행 사진을 정리하면서 지우지 못하는, 아니 오히려 주요 사진으로 따로 분류해 둘 만큼의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는 그 무게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닫기 전까지 그저 그렇게 사진 폴더의 한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니, 조금더 정확히는 그 무게감을 어쩌지 못하고 사진만 그저 들여다볼 뿐 아무런 이야기를 떠올리지도, 꺼내지도 못화고 있었다. 


우리의 6411번 버스

불현듯 그가 떠올랐다. 그가 떠난 게 아마 7월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때 뉴스에서 한참을 떠들던 그의 6411번 버스 관련한 2012년 연설문이 떠올랐다.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  서울 구로구 가로수 공원에서 출발해서 강남을 거쳐 개포동 주공 2단지까지 대략 2시간 정도 걸리는 노선버스입니다.  새벽 4시에 출발하는 그 버스와 4시 5분쯤에 출발하는 두 번째 버스는 출발한 지 15분 만에 신도림과 구로 시장을 거칠 때쯤이면 좌석은 만석이 되고 버스 안 복도까지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바닥에 다 앉는 진풍경이 매일 벌어집니다.   
 새로운 사람이 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매일 같은 사람이 탑니다. 그래서 시내버스인데도 마치 고정석이 있는 것처럼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타고 강남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내리는지 거의 다 알고 있는 매우 특이한 버스입니다. 이 버스 타시는 분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새벽 5시 반이면 직장인 강남의 빌딩에 출근해야 하는 분들입니다. (중략)
  이분들이 아침에 출근하는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딸과 같은 수많은 직장인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만, 그 빌딩을 새벽 5시 반에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이 청소하고 정비하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후략)

사실 그가 6411번 버스를 처음 탄 것은 서울시장 예비후보 선거운동을 하던 2010년이었다고 한다. 당시 노원구 상계동에 살던 그에게 비서가 구로까지 가서 6411번 버스 첫차를 탈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구로에서 출발해 강남에 도착하는 노선이기 때문에 그만큼의 상징성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 버스를 타고 첫차를 탄 사람들을 만나 삶의 무게감을 느꼈을 것이고 이후 2012년 감동의 연설문이 완성된 것이다. 


우주만한 사연을 담는 버스

빌딩에서 페이퍼를 만지며 근무하는 직장인에게도, 그들보다 먼저 출근해 투명인간처럼 존재하는 직장인에게도, 그들을 실어나르는 첫차를 가득 채운 또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그런 첫차를 준비하고 운행하는 사람들에게도 다들 우주만큼의 사연이 있다. 우리가 미처 채 다 알지 못하는 우주만큼의 사연이 있다. 버스는 그런 사연들을 담는 거대한 우주이다.





누구에게나 우주만큼의 사연이 있다. 나의 우주에 그는 하나의 별일 수 있지만 반대로 나는 그의 우주에 하나의 별일 뿐이다. 나와 그의 우주는 다르지 않다. 그저 하나의 큰 우주일 뿐이다.

그러니 차이는 물론이고 차별도 다 무의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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