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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바람 Jun 17. 2024

오래된 사진의 발견

시간 앞에 영원한 건 없더라.


기억이 왜곡되다.

오래된 사진 폴더를 뒤적거리다 위의 첫 번째 사진을 발견했다. 제주 출신에게 기차는 특별한 존재다. 비행기나 큰 여객선보다 교통수단으로서 더 희귀하기 때문이다. 제주에는 기차도, 지하철도 없다. 그래서 사진을 취미로 하게 되면서부터 기회가 닿는 대로 작은 역을 찾아다녔다. 그중 기억에 남는 역이 능내역, 김유정역 등이다. 저 사진도 김유정 역에서 나뉘었다 다시 합쳐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찍은 것인 줄 알았다. 곧게 뻗은 철로는 도무지 무엇과도 만나지 않을 것 같지만 헤어졌다 만나고, 또 이어졌다 이별하는 모습이 사람 사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였다. 순간 반대편에서 찍은 사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원본 사진을 담아놓은 폴더를 찾아갔다.

아니었다! 원하던 대로 다시 갈라서는 철로 사진(두 번째 사진)은 있었지만 김유정역이 아니었다. 화랑대역이었다. 내 머리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완전한 기억의 왜곡이었다. 그러니 절대 함부로 내 머리에 의지해서 우겨서는 안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화랑대역에 대한 숨어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냥 훌쩍 떠나본 날이었다.

사진의 메타정보는 저 사진을 2008년 3월 1일에 찍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삼일절 휴일이었고 3월의 새로운 시작을 앞둔 날이었다. 그날을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워 무작정 카메라를 둘러메고 훌쩍 나섰던 날이었다. 태릉선수촌이 노후화되어 곧 진천으로 옮긴다는 얘기를 듣고 그 주변을 찾아 기록으로 남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차를 몰고 태릉선수촌으로 향했다. 당연히 선수촌 안으로는 못 들어갔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합숙하며 훈련하는 곳을 그리 쉽게 개방할 리가 없다. 가까운 곳에 육군사관학교도 있어 찾아가 봤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않게 만난 것이 저 화랑대역이었다.


그야말로 간이역이었다.

조그마한 역사 건물만큼이나 다니는 기차도, 사람도 별로 없는 그야말로 간이역이었다. 바로 옆에 육군사관학교를 끼고 있어 그런지 철로 옆으로는 꽤 키가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보안시설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그것이 오히려 이 화랑대역을 더욱 고즈넉하고 안락한 느낌을 주는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느낌이었다. 분명 행정구역 상 서울임에 분명한데도 마치 깊은 숲 속에 자리 잡은 고요한 간이역 같은 풍경이었다. 다만 이런 풍경을 즐기는 데에 옆에서 간간이 소음을 내는 공사차량들이 조금 방해가 되긴 했다. 역무원들의 눈치를 보며 그런 풍경들과 만남과 헤어짐의 철로들을 사진으로 담고 돌아왔다. '서울에 이런 간이역이 있네. 조만간 다시 한번 제대로 와봐야겠다.' 하는 생각도 머릿속에 넣어 놓고...


오래된 기억을 새롭게 꺼냈는데...

그런데 그렇게 다시 찾아가리라던 생각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은 물론 엉뚱하게도 다른 역으로 이곳을 왜곡해서 기억하고 있었다니 스스로 민망하기도 하고 어처구니도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미안한 마음에 다시 화랑대역을 찾아볼 생각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그런데! '화랑대역'이라고 검색어를 입력하니 자꾸만 서울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이 검색 결과 상단에 뜨는 것이었다. 이리저리 다시 검색어를 바꿔가며 재검색을 했더니 그제서야 원하던 검색결과를 얻었다. 화랑대역이라는 명칭 옆에 "(폐역)"이라는 표시와 함께 이 장소의 이름이 나타났다. 이미 기차역으로서의 기능을 모두 끝내고 퇴역한 것이었다. 그것도 무려 2010년에 은퇴를 한 것이었다. 오래된 기억을 다시 꺼내어 새로운 기억과 함께 추억의 공간으로 재저장하려고 했건만, 왜곡된 채로 오랜 기간 억울하게 기억되었던 만큼 더 의미 있게 기억해주고 싶었건만 이미 화랑대역은 더 이상 기차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곳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이제 그곳은 화랑대역이라는 이름을 서울지하철 6호선에 내주고 화랑대역(폐역)이라고 불린다. 검색은 오히려 '화랑대 철도공원'이라는 키워드를 넣으면 더 쉽게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검색결과 그곳엔 기존 역사를 리모델링해서 기차박물관을 조성해 두었으며 퇴역한 기차도 전시되어 있고 한쪽으로는 카페도 들어섰다고 한다.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곳이 된 것이다. 경춘선 간이역이었던 화랑대역은 이제 2010년 이전에 이곳을 경험한 이들의 기억에만 남게 되었다. 문득 2008년 3월 1일에 찍은 위의 사진들을 다시금 들여다보게 되었다. 작은 역사 건물 옆의 골재 더미와 포클레인이 더 눈에 띄었다. 혹시 저때부터 준비를 시작했던 것은 아닐까?


다시 갈림길이다.

이제 나는 어떻게 이 공간을 기억하게 될까? 느림의 미학은 경제성과 효율성 앞에서 불필요한 낭만 정도로 치부되어 버리는 현실에서, 간이역이었다가 공원이 되어버린 화랑대역이 어떻게 기억될지 다시 갈라지는 철로 앞에 서있는 느낌이다. 능내역이 폐역이 된 지 꽤 시간이 흐른 뒤인 2022년에 다시 능내역을 찾은 적이 있었다. 능내역은 2008년에 폐역이 되어 방치되어 있다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자 다시 역사 내부를 정비하여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비록 기차는 다니지 않지만 예전 모습을 되살려 역사 건물 내부를 꾸미고 철로도 하나를 남겨놓았다. 자전거 라이더들이나 관광을 나선 이들의 발길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화랑대역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비록 은퇴는 하였으나 그 모습을 그대로 두며 유지할지, 아니면 새로운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바꿀지... 그 또한 퇴역한, 혹은 언젠가 퇴역할 간이역들의 갈림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역들을 어떤 기억으로 내 머릿속에 남기게 될까?



기억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항상 옳은 것은 없다.

늙고 낡으면 불완전해질 수밖에...  그래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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