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풍경을 빌려 오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여행
이제는 누구나 쉽게 여행을 갈 수 있는 곳, 제주도! 그러나 나에게 제주 여행은 엄청난 마음의 각오를 하고 가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여행이다. 항상 긴장하고 다녀야 하고 걸어가는 내내 바라보는 내 시선의 끝에 걸리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 제주는 내 고향이기 때문이다. 본가와 처가가 모두 제주에 있어 제주도를 간다는 것은 집안일을 보러, 어르신들을 뵈러 가는 게 전부였고 그렇게 섬 식구들을 살피다 보면 이내 다시 서울로 올라올 시간이 되고 만다. 혹여 식구들 몰래 여행이라도 갔다가 식구들 중 누구라도 만나게 되면 못내 서운해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쉽사리 제주 여행을 도전하지 못한다. 여행은 현실 공간을 완벽히 벗어나 오롯이 함께 여행하는 사람과만 그 여행지를 즐기는 것이 제맛인데 그러지를 못하는 것이다. 가끔 주변에서 누가 제주도로 여행 가자고 하면 나는 늘 "자기 고향 동네로 여행 가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냐?"면서 나무라기도 하는데, 사실 고향이긴 해도 나는 제주를 너무 여행하고 싶어 한다.
용기 내어 떠났다.
2012년 5월, 식구들을 만나면 어쩔 수 없다는 각오와 엄청난 용기를 내고 제주로 여행을 떠났다. 집이 있는 제주시와 먼 곳을 중심으로 몇 군데를 돌아다니가 서귀포 즈음에 이르러서 올레길을 한 번 걸어보기로 했다. 점차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제주의 풍경을 그윽이 즐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중 바닷가 풍경이 좋은 7코스를 선택해 걷기 시작했다. 외돌개를 품은 바닷길을 통해 여유롭게 걷다 보니 법환포구까지 닿게 되었다. 그 앞바다에는 범섬이 웅장하게 떠 있다. 포구에서 바라보는 범섬은 마치 성산일출봉을 뚝 떼어다가 여기에 심어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저곳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며 바닷속 풍경을 감상하는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겉뿐만 아니라 속도 아름다운 바다이다. 올레길은 종종 마을을 지나치기도 하는데 법환포구는 어선들이 꽤나 오가는 서귀포시 법환동 마을의 중심이다. 그래서 올레길이 법환포구에 가까워지면서부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여기저기 펼쳐진 어구들, 그걸 손질하고 있는 사람들, 작은 가게에서 음료수를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의 옛집들을 활용한 게스트하우스와 작은 카페를 드나드는 사람들 등 그야말로 삶의 현장 그대로였다.
그러다가 어느 집 마당을 만났다.
그렇게 이곳저곳에 시선을 주며 마을의 풍경들을 만나다가 전형적인 제주도 어촌마을의 낡은 집 하나를 발견했다. 애초에 돌담으로만 되었을 낮은 담에는 약간의 시멘트가 발라져 있고, 시멘트 블록을 쌓아 올리고 얇은 슬레이트를 지붕으로 올린 창고가 딸려 있는 집이었다. 작은 마당에는 빨랫줄이 걸려 있고 그 건너 낮은 돌담 너머에는 바다가 있고 그 한가운데 범섬이 아름답게 떠 있었다. 마당 한 켠에 서 있으면 멀리 바다와 범섬이 멋진 오션뷰로 내 눈동자에 기막히게 맺히는 집이었다. 여행객들이 올레길을 걸으며 멋있다며 배경 삼아 찍는 서귀포 앞바다의 풍경이 이 집 마당에 풍경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것이었다. 맞은 편의 낮은 담 너머로 보는 그 집 마당의 풍경은 그렇게 그윽한 아름다움으로 내게 다가왔고 나는 그것을 얼른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언젠가 글을 쓰리라고 모아놓은 사진 폴더에는 이 제주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 중에 딱 이 사진 하나가 들어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제주 올레길 7코스를 걸으며 찍은 사진 중 이 사진 한 장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으로 손꼽히게 되었던 것이다.
풍경을 빌려오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책에서도 그렇고 방송이나 강연에서도 우리 건축물들의 특징을 얘기하면서 "차경(借景)"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건축에서 쓰는 용어로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주위의 풍경을 그대로 경관을 구성하는 재료로 활용하는 기법'을 뜻하는 말이다. 이 '차경'이야말로 자연을 경외(敬畏)의 대상으로 보는 우리의 사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연을 내 멋대로 바꾸어 나의 용도에 맞게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의 자연을 빌려 나를 그 자연 풍경의 일부분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차경이다. 그래서 훌륭한 전통 건축물들은 창 밖의 풍경을, 담장 너머의 풍경을 한껏 빌려다가 있는 그대로를 집 안의 풍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비록 훌륭하고 그럴듯한 건축물이 아니더라도 이 집 역시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집 안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이 작은 집은 한없이 넓은 바다와 범섬을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범섬을 품은 집.
비록 집은 작아도, 사람의 몸집은 작아도 그가 품을 수 있는 것은 무한하다. 세상을 향해 열려 있을수록, 마음의 그릇이 클수록 제 깜냥보다 더 큰 것들도 품을 수 있다. 이 집은 세찬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높은 담을 쌓아 막지 않았기에 범섬과 바다를 품을 수 있었고, 아마도 이 집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세상을 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품는다는 것은 꼭 내것으로, 내 소유로 만들지 않아도 가능한 것이다. 그저 내 시선 안에, 내 마음으로 품으면 되는 일이다. 굳이 내 것이 아니어도 된다. 그것이 좋으면 빌려다가 즐기면 된다. 나 혼자만 즐길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이들과 함께 즐기려면 그대로 두고 빌려오면 된다. 유명한 철학자나 문학가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세상 모든 것은 우리가 잠시 빌려 쓰는 것이 아니겠나 싶다. 집 안으로 무언갈 가져다 놓으려고 집을 키우는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밖을 향해 시선을 열어 세상을 품는 마음을 키울 일이다.
허나 착각하지 말자!
우리는 이 아름답고 거대한 세상을, 세상 모든 것을 다 품을 수 없다.
자연이, 세상이 우리를 품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안기면 된다.
그러면 그 순간, 우리도 세상을 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