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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바람 Jul 26. 2022

절대성과 상대성

만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그리운 사람은 늘어간다


몇 년 전, 봄이 채 다하기도 전에 여름이 불쑥 찾아온 어느 주말.

가까운 이들과 함께 문래 창작촌 투어(?)를 하기 위해 문래역으로 모여들었다. 문래역 출구와 바로 맞닿은 문래 근린공원에서 사진 속의 저 풍경을 만났다. 수수해 보이지만 살짝 멋을 부린 할머니 세 분이 그리 넓지 않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나무 그늘이 주는 시원함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참 보기 좋았다. 저 나이에, 이런 대도시 서울에서, 주말 오전에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점. 그게 참 부럽고도 보기가 좋았다.


노인 빈곤에 대한 뉴스가 가끔 나온다. 절대적 빈곤을 겪는 노인 계층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그만큼 많이 등장하는 것이 상대적 빈곤, 상대적 박탈감 이런 단어들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상대적 빈곤,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자극적이고 선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성이라는 것이 참 그렇다. 내가 그럭저럭 살 만한 데도 나보다  잘 사는 모습을 보면 괜히 주눅이 들어 상대적 빈곤을 느끼고,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모습들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누구나 모두가 소유해야만 그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것이 사라질 텐데 그 어떤 경우에도 그런 경우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분 상승 욕구를 갖고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세상은 그것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본질은 그러하지 않은데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정서 때문에 더 욕심이 생기고, 더 좌절하게 되고 그래서 더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리보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의 상당수는 우리보다 경제적 수준이 낮은 국가들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행복이라는 것은 결코 경제적 수준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 상대적 빈곤을 이야기하며 더 많이 일하게 고, 더 많이 가지려 하고, 그래서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물질 추구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 더 많은 시기와 질투, 더 많은 좌절과 자책들을 느끼게 되고... 그리고는 끊임없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갈등하게 된다. 그래서 상대성이라는 것은 참 자극적이고 선동적이다.

그러다 보니 절대적 빈곤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이야기에 더 귀와 눈이 솔깃해진다. 그리곤 결국 허탈해진다.


다시 어르신들의 문제로...

노인들의 문제를 얘기할 때 절대적 빈곤의 문제만큼이나 심각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외로움의 문제이다. 이는 도시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가끔씩 고독사라는 제목으로 씁쓸한 뉴스가 나오기도 하니까.

절대성과 상대성의 문제는 비단 경제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외로움의 문제는 더 심해지기 마련이다. 선우정아의 노래 '그러려니'의 가사처럼 만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그리운 사람은 늘어간다. 어릴 때, 젊을 때 그 많던 친구들이 세월이 가면서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곁에 남아 있는 이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게 되어 있다. 특히 도시의 삶은 더 그런 듯하다. 필요에 의해 만났다가 필요가 다하게 되면 서서히 멀어져 가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필요에 의해 만나는 이들은 친구가 아니다. 

SNS를 통해 속 깊은 대화를 하는 친구를 새롭게 만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온기가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꾸 SNS를 기웃거리게 되는 것은 SNS 세상에서 보게 되는 많은 사람들은 다들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것 같고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나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달래보고 싶은 내면적 욕구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SNS 속의 사람들은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친구들과, 그렇게 많은 곳을 다니며, 그렇게 맛난 음식을 그리고 많이도 먹는 건지... 그런 세상을 보면서 되려 상대적 외로움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 나 또한 그런 일을 하게 되고 내 게시물에 달리는 좋아요 숫자를 보며 위안을 삼게 되곤 한다. 사람에 대한 상대적 빈곤이 낳은 결과이다. 되돌이켜 볼 일이다. 주변에 사람은 많지만 상대적 외로움을 더 많이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끔씩은 절대적 외로움에 몸서리를 치고 있지는 않은가.


사진 한 장이 참 수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나 역시 저 사진 속 할머니들의 모습이 너무너무 부러워서였을지 모른다. 경제적인 것은 모르겠지만 저분들만큼은 절대적 외로움이라는 것이 별로 없을 것 같아 보였다. 소곤소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이른 여름날 나무 그늘 아래 작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다. 상대적 박탈감에 경제적인 것을 쫓아다니다가 사람을 잃어 절대적 외로움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겠다. 그리고 상대성을 갖고 스스로 괴로워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행복이라는 것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것이니까.


주변에 사람이 많다고 자랑할 일이 아니다. 따뜻한 온기를 느끼지 못하면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낄 뿐이니까. 경제적인 것보다는 사람에 대한 상대적 빈곤을 걱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미지근한 온기라도 늘 함께 하길 기원해본다. 남들보다 뜨겁지 않아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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