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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바람 Nov 16. 2022

타자기를 만난 어느날에...

흰 종이가 한 장 있다. 종이의 질감을 손으로 느낄 수 없는 그런 종이이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진동을 느낄 수 있는 연필로는 글씨를 새길 수 없는 그런 종이이다. 그 종이에 글씨를 새기려면 자판을 두드려야 한다. 자판을 치면 깔끔한 활자로 된 글꼴이 하나씩 드러난다. 'ㄱ'을 치고 'ㅏ'를 치면 'ㄱ'의 끝 모양이 자연스럽게 구부러지며 '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거기에 'ㅇ'을 치면 'ㄱ'과'ㅏ'의 길이가 짧아지며 자동으로 '강'이라는 글자가 예쁘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기다린다. 그 다음에 이을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무엇을 쓸지 고민하는 시간이다. 모니터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ㅣ' 모양의 것이 대략 1초에 한번씩 깜빡거리고 있다. 압박을 느낀다. 무언가 빨리 쳐 넣어야 할 것 같은 압박이다. 커서의 그 깜빡거림은 무엇인가를 빨리 내뱉어 달라고 요구하는 듯이 끊임없이 같은 속도로 계속해서 나를 향해 말을 걸어 온다. 절대 멈추지 않는다. 안 그래도 글을 쓰는 데에 부담감이 늘어가고 있는데 그런 요구에는 도통 쉽게 응하지 못한다. 결국 저장 버튼을 클릭하고 창을 닫아 버린다. 모니터에 떠있던 흰 종이도 함께 어디론가 사라진다.



언젠가 강화 어딘가를 돌아다니다가 커피 한 잔이 그리워 옛 분위기가 물씬 나는 고즈넉한 카페에 들어간 적이 있다. 테이블도 많지 않았고 일하는 이도 주인으로 보이는 30대 중후반의 한 여자분만 있었다. 구석 창가쪽에 있는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 주변을 둘러 봤다. 카페의 겉모습과 비슷하게 내부도 옛 물건들이 곳곳에 자리잡아 이 카페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오래된 세계지도와 그 앞에 꽤나 고풍스러워 보이는 지구본이 있어 커피 한 잔 하면서 이국으로의 여행을 상상하며 얘기해보기에 참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 옆 한 쪽에 타자기가 하나 놓여 있었다. 옆으로는 책등이 빛에 바랜 십수권의 책이 놓여 있었고 그 앞으로 수동 커피 그라인더도 놓여 있었다. 종이로 된 책과 타자기, 그리고 수동 커피 그라인더... 요즘 같이 빠른 것이 대우받는 세상에서 자꾸만 뒤로 밀려나게 되는 것들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타자기를 몇 번 경험해본 적이 있었다. 글자 하나하나를 치는데 생각보다 강한 타격이 필요하다. 단어 하나를 새기는데 생각보다 묵직한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당연히 타이핑을 하다보면 소음도 상당하다. 반면 속도는 컴퓨터 자판보다는 훨씬 느리다. 한번 새겨진 글꼴은 지워지지도 않고 변형되지도 않는다. 'ㄱ'은 '가'이든, '강'이든 같은 모습의 'ㄱ'으로 그대로 남고 그 뒤에 모음과 받침이 덧붙어 글자가 완성된다.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예쁜 폰트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투박한 채로 그냥 글씨를 완성해낸다. 글자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 자음과 모음을 그냥 조합한 느낌의 그런 글씨가 타자기를 통해 흰 종이에 새겨진다. 그렇게 투박하고 거친 녀석이 고민의 시간이 되면 침묵한다. 그 침묵마저도 묵직하다. 아무런 움직임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주인의 고민이 끝나 강한 손가락 힘으로 내리치는 타격을 기다린다. 그저 주인장이 오롯이 깊은 사색과 고민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묵직하게 기다린다. 그러다 도저히 더는 안되겠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도 그 상태 그대로 다음 글자를 기다리며 묵묵히 기다린다. 흰 종이도 그대로 타자기에 꼽혀 있는 채로 다음 단어가 새겨지길 기다린다. 사라지지 않는다.


기다리는 이는 그 기다림의 시간이 고통스럽겠지만

우리는 대체로 긴 사색과 떠돎의 시간을 마치고 돌아 왔을 때

마치 처음의 그 모습처럼 그대로 그가 남아 있기를 고대한다. 묵직하게...

예전처럼, 옛날처럼, 아날로그적으로...

아무런 재촉없는 침묵의 기다림...


허나 지금 디지털의 시대에서는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게 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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