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에 대하여
‘아픔’ 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내가 규정하는 아픔, 타자가 규정하는 아픔.
우린 ‘아프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더욱 미워하고, 타자를 배척한다.
그러나 아프다는 게 대체 뭐길래, 또 각자의 눈에 ‘아픈 사람들’ 이란 어떤 사람들이길래 그리 쉽게도 아프다는 단어를 제멋대로 갖다 붙이곤 할까.
아프다, 라는 단어는 비정상이라는 규범적 단어로도 통용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쉽게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눈에 정상적이지 않고, 다르고, 틀렸다고 믿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아프다고 명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틀림의 대상이 자신을 향하기도 한다.
사회의 주류 속에 속하지 못하는 나,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성, 올바름의 범위를 한참 벗어난 나, 그러니 사회가 정의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되기엔 글러버린, ‘틀린’ 나.
컨텐츠는 시류를 가장 투명하게 반영한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바라고, 욕망하는지를 보여주는 게 바로 컨텐츠,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르고 다양한 영상 컨텐츠의 힘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컨텐츠의 영향력은 사람들이 애써 외면해 왔고 때론 직면하고 싶지 않아 했던 것들을 마침내 직면하게 하고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힘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이름들로 정의된다. 수많은 타자는 나에게 내가 바란 적 없었던 이름을 붙이고, 때문에 나는 때론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이름들로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들여다보고 싶었다. 다양한 이름들에 대해.
한 때는 불려봤던 이름들도 있을 테고, 또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들로 불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수많은 세계의 이름들을 알게 되고, 그 이름들로 불리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게 되고, 과연 그 이름으로 불리우는 게 그들에겐 정당한 일인가, 한 번쯤은 묻고 싶었다.
그리고 이를 우리에게 직면하게끔 기회를 준 컨텐츠들을 통해 다룸으로써 다양한 이름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시각에 대해 논하게 될 수 있게 됨에, 감사한다.
이름들을 직면하고 마주함으로써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될 것. 그게 아마 내가 이 주제를 다루게 된 이유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