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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ma Oct 27. 2024

다름이 자유가 아닌

대도시의 사랑법






                재희와 흥수에게는 각자의 불행이 있다. 

재희는 남들과 조금 다르고, 그런데 심지어 ‘여자’라서 다수자 남성들로부터 무차별적인 공격을 당한다. 그저 남자인 그들이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럼에도 재희는 지치지 않고 사랑을 한다. 거기서 거기인 남자를 아주 수차례 겪고도 끝내 사랑을 선택하는 재희는 어쩌면 정말로 용기 있는 부류일지도 모른다.




            재희의 삶은 나와 아주 다르지만, 재희를 동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다름을 꺼내고 남들에게 까뒤집어 보여도 스스로에게 당당하면 그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 


몇 차례의 방황과 상처를 거쳤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 이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갖고 살아간 재희는 끝내 자신의 행복을 선택할 것이란 사실도, 부러웠다. 재희에겐 ‘벽’이 없다. 언제든 원하는 상대를 쟁취할 수 있고, 그런 재희를 사회는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 아주 조금의 픽션적인 요소가 가미돼 있긴 하지만 - 가령 술자리에서 젠더혐오적 발언에 격하게 분노를 하고서도 아무런 일 없이 지나간다던가, 하는 영화적 허용 같은 부분들.








                반면 흥수에게는 ‘벽’이 있다. 그것도 아주 높고 견고한 벽. 흥수는 아웃팅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유일한 가족인 엄마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게 흥수에겐 가장 큰 두려움이며, 그런 자신을 사회 또한 마찬가지로 부정할 거란 굳은 믿음에서 오는 ‘연애’ 에 대한 부정, 그저 즐기며 살면 그만이라는 한탕주의적인 사고방식. 

            

            나는 흥수를 연민할 수 있나? 이해와 공감은 다른 영역인데, 내가 감히 흥수에게 공감할 수 있나? 묻는다면 나는 잘 모르겠다. 극중 대사에서도 흥수가 재희에게 니가 뭔데 날 이해해, 라는 말을 하는데 - 한국과 같이 동성애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나와 다른 정체성을 가진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발언 자체가 듣기 싫을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재희가 흥수에게 했던 말처럼, 내 스스로가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라 믿는다면 그 우울에서도 영영 벗어날 수 없다. 흥수가 끝내 수호를 잃고 난 뒤 그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처럼, 모든 사랑엔 용기가 필요했던 거다. 단지 그 용기가 흥수에겐 남들보다 조금, 아니 어쩌면 훨씬 더 많이 필요했던 것 뿐.








                분석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요즈음을 비연애의 시대라고 칭한다 한다. 나는 지금의 시대가 다양성을 표방하려 하지만, 오로지 주류가 인정하는 한도 내의 다양성만이 인정되고, 때문에 주류와 비주류는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공존하는 시대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비연애를 택하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 생각한다.








                나는 내가 주류인지, 아님 비주류인지 모르겠다. 가늠이 안 간다. 내가 불편하다 느끼는 것들이 주류인 그들의 일상이며 온상이라면 나는 비주류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겪지 않은 또다른 집단이 나를 불편하다 여긴다면 그들의 눈에 나는 아마 주류일테니까.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다. 내가 어떤 집단에 속하고, 내가 주류에 속해 스스로를 더 긍정할 수 있게 되느냐 따위가 아니다.


주류와 비주류 같은 걸 더이상 나눌 필요가 없고, 다양한 규범들의 경계가 흐려져 더이상 흥수와 재희를 ‘자유롭다’ 같은 단어 따위로 칭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우리에겐 절실하다. 



그들은 그냥 존재한다는 단어 자체로도 충분하다. 

규범을 넘어서는 ‘자유로움’ 따위의 단어로 묘사되는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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