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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중 Aug 11. 2021

자전거 도둑

오랫동안 방치해 둔 자전거를 다시 타려고 하니 묶어놓은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생일이나 전화번호 같은 가능한 숫자를 이리저리 조합해 봐도 소용이 없다. 제 소임을 다하려는 듯 입을 딱 다문채 꿈적 않는 자물쇠. 좋게 대할 때 입을 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공권력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순리적으로 푸는 방법을 포기하고 강제로 자물쇠를 끊어야겠는데 집에는 강력 절단기가 없으니 동네 파출소로 자전거를 끌고 가기로 한다. 언젠가 지구대에서 대형 니퍼로 이런 민원을 해결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민중의 지팡이 경찰답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나의 첫 파출소 민원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만 갔다. 자전거를 파출소 안으로 들일 때만 해도 5분 정도면 끝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냥 싹둑 자르면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샤프해 보이는 젊은 경찰은 내 말을 다 듣고 나서도 연신 고개만 갸우뚱할 뿐이다. 나의 '어서 잘라주세요'라는 무언의 눈빛을 그는 장기하의 '그건 니 생각이고' 가사처럼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 같다. 왜지? 이 젊은 경찰은 삐딱하게 휜 지팡이인가?

 

마침내 그는 니퍼가 아닌 펜을 들었다. "이 자전거가 선생님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죠?" 언뜻 정중한 말투지만 그의 무표정에서 '어디서 눈먼 자전거 하나 들고 와 수작이냐'라는 숨은 뜻이 읽혔다. 


지극히 자명한 진리에 대해 설명을 강요받으면 종종 당황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내 것인데, 내 것이 아니라니'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상식적인 질문에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의심이 깊어지는 법인지 이어지는 그의 취조 아닌 취조는 의표를 찌른다. " 혹시 소유를 입증할만한 증거라도 있나요?  뭐, 자전거 타는 사진 같은 거라도..." 소유 입증, 증거 사진이라는 딱딱한 용어가 나오니 내 머릿속도 점점 경직되어 간다. 


재빨리 기억을 스캔해봐도 마뜩한 것이 쉽게 떠올라 주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셀카든 남이 찍어주든, 사진 촬영 자체를 귀찮아하는 게으른 인간이 이런 일을 예상하고 증거용 사진을 미리 찍어두었을 리가 만무하다.  


처음엔 절차적 차원에서 출발했을 그도 점점 안절부절못하는 나에 대한 판단을 단순한 민원인에서 차츰 절도 피의자로 전환하는 것 같다. 아마도 일요일 오후의 덥수룩한 내 수염과 껄렁껄렁한 슬리퍼도 한몫을 했으리라. 


 "ㅇ순경, 무슨 일인데 그래?" 그가 한두 명씩 주위로 모여드는 다른 경찰들에게 귀엣말로 속삭이는 것을 보니 지금까지는 설마 했었던 내게도 돌아가는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다.


무증유죄. 사진이 있어야만 진짜 자전거 주인이 되고, 없으면 자전거 도둑이 되는 상황. 이제 와서 '사진을 못 찾겠으니 내 자전거지만 그냥 포기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절도 미수를 자수하는 꼴이 될 것이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며  필사적으로 스마트폰의 사진 갤러리를 좌우로 밀어 재껴 보지만 제길, 별로 찍지도 않은 사진이 오늘따라 왜 이리 많은 거야?


실체적 진실과는 상관없이 민원인이 거증책임을 저야 하는 프레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허~ 이 아저씨, 요즘 페북 같은 것도 안 하나? " 라며 한 중년 경찰이 지나가며 딱하다는 듯 혀를 찬다. 


그제야 처음 자전거를 샀을 때 카카오 스토리에 자랑 글을 올린 것이 불현듯 생각났다. 지금은 카스를 잘 안 하다 보니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애먼 사진 갤러리만 찾았으니 시간 낭비만 한 셈이다. 


앱을 제설치 하고 휴면을 풀고... 복잡한 절차를 밟아 재접속해보니 떡 하고 그날의 게시물이 남아있다. '드디어 득템'이라고 제목 붙인 자전거 사진과 함께

 

이제부터는 공수 전환, 아니 태세 전환 시간이다. 증거 사진을 보고도 쉽게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그는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며 "자전거 안장 색깔이 사진 속하고는 다른데요" 라며 마지막 태클을 걸었다.


10년이 지난 자전거가 리폼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냐고, 숲과 나무처럼 안장만 보지 말고 전체적인 자전거 프레임을 보시라고 그에게 웃으며 일러주었다. 


드디어 싹둑!  5분이면 들렸을 소리가 30분이 지나서야 겨우 들린다. 그것은 억울한 누명의 순간이 속시원히 떨어져 나가는 소리이기도 했다. 수갑이 풀리듯 우여곡절 끝에 풀려난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며 앞으로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웬만하면 파출소 신세는 지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만약 그날 카스 사진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곤란한 상황이 밤까지 이어질 수 있었으리라. 한동안 SNS 활동을 무용하다고 생각하여 멀리했는데 난처한 순간 의외의 도움을 받다니 아이러니하다. 민망한 자랑질도 예측불허의 인생에서는 가끔 쓸만하구나.


한편으로는 시종일관 나를 의심하던 그  ㅇ순경 이야말로 어쩌면 이 시대 경찰상에 부합하는 민중의 지팡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홍길동처럼 대담한 도둑이 남의 자전거를 끌고 와  버젓이 소유권을 취득하지 말란 법도 없으니 말이다. 방법론적 회의로 무장된 그 같은 경찰이 우리 동네 파출소에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든든하게 여겨진다. 


애지중지하던 자전거가 자물쇠가 잘린 채 공공 거치대에서 휑하니 사라졌을 때의 착잡함이란 당해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을 것이다. 현실에서의 자전거 도둑은 영화 속 자전거 도둑처럼 낭만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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