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 아빠가 재수하는 딸에게 너무 무심한 것 아냐"
퇴근해서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아내가 리모컨을 치워버린다. 그렇게 누워있지만 말고 비도 오는데 밤늦게 학원에서 돌아오는 딸내미나 데리고 오라고 등을 떠민다. 별수 없이 점퍼 하나 걸치고 우산 두 개를 든 채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을 나간다. 아닌 게 아니라 어느새 가을비가 쌀쌀해서 밤길이 더욱 어둡고 춥기만 하다. 그제야 딸이 매일 밤 혼자 터벅터벅 걷는 이 길이 꽤 멀게 느껴졌을 거라 짐작해 본다.
밤 11시가 지난 비 내리는 심야의 정류장에는 지나가는 버스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드문드문하다. 어둠을 뚫고 달려온 버스 한 대가 도착하더니 칙~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하차문이 열린다. 마치 이웃집 토토로의 고양이 버스처럼 일군의 사람들을 우르르 토해내지만 그중에 내가 기다리던 딸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어디선가 웬 중년의 아저씨가 툭 튀어나와 한 여학생에게 우산을 척~하고 받쳐 든다. 아마 아빠와 딸인 것 같은데 몇 년 전 공항에서 노룩패스를 시전 한 국회의원처럼 가방까지 툭~하고 떠넘기는 저 여학생은 마치 재벌 2세 실장님 같은데 저 아저씨는 꼭 비서실 만년과장 같다.
쯧쯧... 저 양반, 자식을 너무 오냐오냐 키웠구먼. 저렇게 애지중지해봤자 다 부질없다는 걸 모르나. 분명 집사람에게 등 떠밀려 나왔을 추리닝을 걸친 저 사람이 자기 집에서는 어떤 위치일지, 나중에 깍쟁이 같은 딸에게 어떤 대접을 받을지는 안 봐도 훤히 알 것 같다.
나는 저 아빠처럼 불쌍한 인생을 살지는 말아야지 다짐하는 사이, 또 한대의 버스가 도착했다. 멀리서 승강장에 내리는 딸을 발견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용수철 마냥 튀어나가게 되었다. 가뜩이나 몸도 약한 애가 웬 가방은 저리 큰 걸 가지고 다니는 건지.... 얼른 그 가방을 뺏어 등 뒤로 메었더니, 어이쿠! 가방이 또 무겁기는 오지게도 무겁다.
한발 한발 걸으면서 짐짝 같이 무거운 가방 속에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지 생각해 본다. 아마도 이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두꺼운 참고서나 문제집이 아닐 것이다. 수능이 끝난 지난 겨울 딸이 흘렸을 눈물, 재수를 시작한 지난 봄의 서러움, 유난히 더웠던 지난 여름의 땀방울이 이번 가을 차가운 한숨과 함께 지난 1년간 꾹꾹 쌓여서 이렇게나 무거운 것이리라. 이제 막바지인데 아무리 해도 점수가 안 나온다는 딸의 초조함에 내 마음도 따라 무겁다. 아빠가 돼서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지만 아무런 말도 해줄 수가 없구나. 그저 곁에서 우산 들고 따라 겉기만 할 뿐.
이제 수능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그날엔 그저 춥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살짝 욕심내어 한 가지만 더 바라본다면 오늘 아빠의 마중길이 내년 벚꽃 피는 계절에는 멋진 남자 친구가 집에 배웅해주는 꽃길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