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일본어 시험 후 애써 외운 단어 까먹을 것 같아 주일 한국문화원 게시판에 일본인 회화 친구를 신청했다. 그렇게 해서 연결된 나오코 상은 갓 태어난 손자가 있는 요코하마 할머니로 한국과 K-POP에 관심이 많아 내게 연락을 하게 되었단다.
처음 어색함도 잠시, 시간을 정해 보이스톡으로 통화하다 보니 매일 즐거운 마음으로 일본어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도 이야기를 나누고 마루로 나왔는데 우리 집 두 여자의 눈빛이 날카로운 것이 왠지 분위기가 싸늘했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나셨을까? 밖에서 들으니 둘이 하하 호호 신이 아주 나셨던데요~"
라며 아내가 입이 삐쭉 나와 비아냥거린다. 아마 내 방에서 나오코 상이랑 스피커 폰으로 큰 소리로 통화한 내용이 마루에까지 들렸나 보다
나 : 그냥 일본어 회화한 것 가지고 뭘 그래....
아내 : 회화를 하려면 일본 남자도 많은데 왜 굳이 여자하고 해야 해?
나 : 뭔가 오해했나 본데, 나오코 상은 할머니야
아내 : 아~ 그러셔, 그런데 할머니한테 "카와이~ 카와이~ " 가 왜 나와?
가만... 그러고 보니 아까 나오코상이 어렸을 때 실수한 이야기 들으면서 "하하~ 나오코 상도 귀여우셨네요"라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나 : 난 그냥 돈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문화원에 신청해서 연결된 것 뿐인데
아내 : 차라리 돈 내고 학원 가서 선생님에게 배우지,왜 외간 여자하고 야밤에 통화를 하나고요
음... 이쯤 되면 내가 무슨 말을 한들 꼬투리만 잡힐 뿐이다. 더 이상 할 말을 못 하니 엄마 곁에 있던 딸내미가 일격을 가한다.
딸 : 아빠 왠지 수상해.... 혹시?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얄밉다고 이럴 땐 딸이 아니라 영락없는 내가 낳은 시누이다
나 : 모처럼 외국어 공부 좀 하려는데 이 사람들이 별소릴 다하네
아내 : 아~ 그러셔? 공부라면 그럼 나도 어떻게든 상관없지?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곤 아내는 안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참나~ 무슨 생각이길래 나의 이 순수한 학습의지를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지 원..
며칠 뒤, 퇴근 후 돌아와 보니 아내가 미드를 보며 큰소리로 따라 하는 중이었다.
나: 웬일이야, 영어공부 다시 시작한 거야?
아내 : 응, 이따 잭슨이랑 같이 할 거야
' 잭슨? 근데 잭슨이 누구지?'
방에서 옷을 갈아입자니 나도 모르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왜 상대가 제인이나 도로시가 아닌 하필 잭슨인걸까?
잭슨 이 노무 자식을 내 그냥....
나 : 이봐 ~ 도대체 잭슨이 누구야?
아내 : 갑자기 왠 잭슨? 잭슨이 누군데?
나 : 이제 와서 모른 척하시긴, 모르는 사람 이름이 아까는 어떻게 자연스럽게 나온 건데?
아내 : 아~ 그 잭슨, 큭큭...
아내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씩~ 웃으며 눈길을 들어 건너편 식탁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포장 박스 속 백발의 할아버지 사진이 나를 향해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함께 즐겨요 ~ 파파 잭슨 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