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교실 안의 야크
사람 없는 극장에서 낯선 나라의 낯선 영화를 보다.
아직 가본 적 없는 부탄이지만 영화는 그 나라 사람들의 미소처럼 맑다.
한 편의 픽션을 보았다기보다는 드넓은 고원에서 청정한 공기 한 모금 마시고 방금 내려온 것 같다.
영화 처음, 도시학교 교사가 벽지 학교로 발령을 받게 되자 오지 중의 오지라며 불평한다.
나의 이동 반경상 오지라는 개념은 기껏해야 강원도 어느 산골 마을 정도여서 "그냥 5일 일하고 주말에 어슬렁 집에 다녀오면 될 텐데 호들갑은..."하고 속으로 나무랐다.
하지만 괜한 엄살이 아니었다. 그가 버스 정류장에서 부임지로 도착하는 데에 꼬박 8일이 걸렸다. 그것도 산 넘고 물 건너 오롯이 걸어서만.., 히말라야를 가진 나라에서 "산 넘고 물 건너"란 얼마나 고된 것인가!
한편으로는 지구 한 편의 현실, 교통이 닿지 않는 마을과 칠판 하나 없는 교실을 스크린 너머로 마주하면서 안타깝기도 하지만 혼란스럽다. 혼란한 이유는 자살 1위의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 행복지수 1위의 국민에게 할 소리는 아니므로
극장을 나오며 다른 이들은 어떻게 보았나 후기를 검색해보니 누군가 "극 중 주인공이 쉽게 마음을 바꾸게 된 상황설명이 부족한 것 같네요"라며 스토리 라인의 분절된 흐름을 언급하였다.
물론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이야기의 개연성은 영화 속 한 사람과의 만남에서 이미 시직 되지 않았을까?
바로 요놈!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학급 반장 팸잠
조곤조곤하게 늦잠 자는 선생님을 깨우러 온 어린 소녀는 단순히 아침잠만 깨운 것이 아니라 교사로서의 잠자던 소명도 함께 일깨웠음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철부지 교사의 변화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가끔 아이들의 형형한 눈빛을 발견하거나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마주할 때는 나도 모르게 가슴 한켠이 뻐근해질 때가 있다. 이런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꿈과 함께 설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다.
그 고마운 기운을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할 텐데,,,,
나는 과연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니... 그런 자격이 있는 건지 그것부터 모르겠다.
- 너는 왜 선생님이 되고 싶니?
- 선생님은 미래를 어루만지는 사람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