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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부성애와 연관된 개천에서 용 나기

오늘 소개하는 작품 ‘빌리 엘리어트’는 1980년대 영국의 탄광촌에서 자라난 소년 빌리가 로열발레단의 발레리노로 입단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한 마디로 압축하면 영국 버전 ‘개천에서 용 나기’다.     


빌리의 아버지가 빌리에게 가르치려는 스포츠는 처음부터 발레가 아니다. ‘권투’다. 여기서 권투와 발레는 일종의 ‘계급’을 표상한다. 빌리의 아버지는 빌리가 권투보다는 발레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들이 발레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조차 하길 싫어한다. 이는 빌리의 아버지가 몸담고 밥을 먹는 탄광 노동자가 착안할 수 있는 최상의 스포츠는 권투이지, 절대로 발레가 아님을 보여준다.     

권투는 ‘헝그리 정신’이 아니고서는 성취가 불가능한 스포츠다. 상대에게 펀치를 가격해야 하지만 그 전에 맞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맞는 게 이골이 나야 성취가 가능한 스포츠다. 권투는 유한계급, 있는 자가 성취하기보다는 아무것도 없는 악바리가 근성 하나만으로 성취가 가능한 스포츠다.      


올림픽에서 한국의 스포츠, 그 가운데서 권투와 레슬링이 금메달 효자 종목이던 때는 90년대 이전이다. 국민 소득이 올라가기 시작하던 한국은 90년대부터 금메달 효자 종목인 레슬링과 권투 등의 격투기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빈도수가 점점 낮아지기 시작한다. 빌리의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가르치려 하는 권투는 영국 상류층의 스포츠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이 쉽게 관심을 가질 만한 종목이다.     


이 뮤지컬이 다른 뮤지컬에 비해 ‘개새X' 같은 비속어가 차고 넘치는 이유는 빌리와 빌리의 아버지가 포함된 계층이 상류층이나 중산층이 아닌 영국의 노동자 계급임을 대사로 들려주기 위함이다.      

더불어 다른 뮤지컬에 비해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심화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격하게 표현된다. 빌리는 아버지에게 욕을 하고, 빌리의 형은 아버지의 얼굴을 때린다. 어머니가 없이 남성만이 가득한 빌리의 가정이 얼마나 불안정한가를 보여주는 묘사이자 동시에 상류층이나 중산층이라면 말로 불만을 표출해도 될 것을 과격한 언어, 물리적 폭력으로 해결하기 쉬운 노동자 계급임을 상기시키는 연기적이자 언어적인 연출이다.      


빌리가 재능을 가진 발레는 노동자 계급에게 친숙하지도 않고 발레 교습 비용도 만만치 않다. 돈이 있는 유한계급만이 어릴 때부터 발레에 친숙할 수 있고 발레 교습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 뮤지컬 대사에 등장하는 (루돌프) 누레예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라는 인명만 보더라도, 평소 발레에 관심이 없는 관객이라면 무심하게 흘려버릴 수 있는 발레 거장의 이름이다.      

2막에서 빌리가 로열발레단 오디션을 볼 때 다른 지원자의 부모들이 빌리의 아버지를 멀리하는 장면은, 오디션 지원자의 계층이 상류층이나 중류층임에 비해 어떻게 광부의 아들이 발레를 배울 수 있는가 하는 영국 상류층의 편견어린 시선을 보여준다.     


빌리가 로열발레단에 오디션을 치르기 전에 빌리의 차비와 오디션 비용을 어떻게 충당하는가를 2막에서 살펴보라. 빌리의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광산 파업에 동참한 빌리의 동료가 가진 돈만으로는 빌리의 상경 비용과 오디션 비용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빌리가 오디션을 볼 수 있는 만족할만한 비용을 위해서는 광산 파업에 가담하는 조합원들이 배신자라고 낙인찍은 파업 철회 근로자가 빌리에게 내놓은 수백 파운드의 돈이 있기에 가능했다.      

빌리의 발레단 입성이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빌리 아버지의 동료들, 심지어는 파업 철회 근로자마저 지갑을 연 이유는 빌리라는 한 개인이라도 노동자 계급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영국 광부들의 심경이 뮤지컬의 2막에는 구구절절이 배어있다.      


석탄 가루를 마시는 탄광 노동자의 삶을 빌리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빌리 아버지의 마음이 파업 철회 근로자의 마음까지 움직인 결과 덕이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빌리가 영국의 명문 발레단인 로열발레단에 발레리노로 입단하는 성공기 ‘개천에서 용 나기’를 극적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빌리의 로열발레단 입성기를 빌리의 형과 아버지에게까지 대입하면 이 뮤지컬은 빌리의 아버지가 포함된 탄광 노동자가 노동자라는 계급을 대물림하고 싶어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계층 상승의 사닥다리와도 연관되는 뮤지컬임을 알 수 있게끔 만든다. 


미디어스 (사진: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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