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와 이들의 사이에 두 남자가 있다. 주인공 종수(유아인 분)는 어릴 적 고향 친구인 해미(전종수 분)를 사랑하지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기도 전에 모든 걸 다 가진 벤(스티븐 연)이 나타난다. 암컷과 교미하고 나서 머리를 물어뜯기는 수컷 사마귀 마냥, 종수는 해미에게 연정을 품자마자 사랑을 고백할 틈도 없이 모든 걸 다 가진 남자 벤에게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긴다.
이창동 감독은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되 원작을 전부 영상으로 옮기지 않고 재해석을 통해 <밀양>을 만든 적이 있다. 이창동 감독은 이번 영화를 만들기 위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가져오되 이번에도 원작을 고스란히 영상으로 옮기지 않고 모티브만 따와서 새로운 이야기로 재해석하고 있다. <헛간을 태우다>보다 이야기의 층위가 다양하고 두터워졌다.
하지만 자세한 분석을 하다가는 스포일러를 피할 방법이 묘연해지고 만다. 이에 필자는 이제 막 개봉한 영화의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라는 도식으로 이 영화의 세 남녀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맥거핀인 ‘우물’과 ‘고양이’로 영화를 풀다가는 도저히 스포일러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는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 중 만난 부시맨들이 사용하는 사회적 개념이다. ‘리틀 헝거’는 육체적인 굶주림에 직면한, 말 그대로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다. 하지만 ‘그레이트 헝거’는 음식만으로 허기를 달래는 차원의 굶주린 이가 아니다. ‘삶의 의미’라는 정신적인 층위의 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해미가 언급한 ‘리틀 헝거’를 영화 속 세 인물에 대입해 본다면 벤이 ‘리틀 헝거’에 가깝다. 벤을 외양적으로만 본다면 모자란 것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내면을 보면 ‘일차원적인 굶주림’에 직면한 사람이다.
한 여자에 만족할 줄 모르고 항상 새로운 여자를 만나기를 바라는 일차원적인 리비도(libido)에만 집착한다. 또한 벤은 파괴적인 충동을 갖고 있다. 두 달에 한 번씩 비닐하우스를 불태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다. 정신적인 승화(昇華)를 모른 채 물질적인 분출 욕구에만 집착하는 벤은 ‘리틀 헝거’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종수의 고향 친구 해미도 ‘리틀 헝거’에 가까운 캐릭터다. 많은 영화가 ‘가족주의’를 절대적인 가치관으로 설파하지만 이창동이 만든 많은 영화에서는 가족주의를 칭송하기는커녕 해체하기 일쑤다.
<초록물고기>에서 한석규는 온가족이 오순도순 모이는 가족주의라는 환상을 갖지만 영화는 이를 처참하게 깨부순다. <밀양>에서 전도연은 남편이 죽은 것도 모자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어버린다.
<버닝> 속 해미도 마찬가지다. 가족에게 카드빚을 떠안긴 채 책임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책임’은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용기 있는 행동이다. 해미가 겉으로는 부시맨의 ‘그레이트 헝거’ 의식을 흉내 내고 춤추지만, 해미의 속사람 가운데에는 가족에게 카드빚을 안긴 책임을 질 줄 아는 성숙한 내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정신적인 탈출구를 찾기 위해 나레이터 모델로 모은 돈을 아프리카 여행에 쓸 줄은 알지만 가족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안긴 카드빚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는 미성숙한 태도를 보이는 해미는 속사람이 성숙하지 못한 ‘리틀 헝거’에 다름 아니다.
생활고를 면하기 위해 종수보다는 벤에게 달려간 이가 해미라는 점을 상기하라. 해미가 물질적인 만족보다 정신적인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했다면 벤을 따르기보다는 종수를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택했겠지만 해미는 그렇지 못했다.
유아인이 연기하는 종수는 벤과 해미에 비해 ‘그레이트 헝거’에 가까워 보인다. 종수의 가족은 해미의 사례와는 달리 ‘해체’에 가까운 가정이다. 어머니는 오래전에 집을 나갔고,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로 폭행 재판을 받는 중이다. 재미있는 점은 종수의 아버지 역할을 연기하는 카메오가 MBC 최승호 사장이라는 점이다.
정신적으로 기댈 가정이라는 안식처를 상실한 종수에게 남은 마지막 정신적인 안식처는 해미다. 사랑하는 해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종수의 모습은 가족이라는 마지막 보루를 잃어버린 한 청년의 분투기다.
만일 종수가 벤처럼 ‘리틀 헝거’다운 인물이었다면 종수는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는 비인격적인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인격적인 대우를 포기하고 돈을 벌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종수는 그런 비인격적인 사업장을 뛰쳐나와 해미를 찾는 것에 혈안이 된다.
종수가 ‘리틀 헝거’적인 인간이었다면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는 비인격적인 사업장이라는 자본에 종속되었을 텐데, 종수는 이런 자본의 포획 안에 자신을 가두는 것을 포기하는 ‘그레이트 헝거’로 자리한다.
미디어스 (사진: CGV아트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