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트홈’은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처럼 정상적인 국가라면 제대로 작동돼야 할 국가적인 시스템이 재난을 맞이했을 때 작동되지 못하는 상황에 대비하는 개인의 상황에 천착하는 드라마다.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더라도 얼마나 ‘각자도생’이란 마인드를 갖고 잘 처신해야 하는가를 묻기에 말이다.
‘스위트홈’이나 ‘부산행’, ‘워킹 데드’ 같은 일련의 작품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요한 과제는 각자도생이지만, 그 각자도생을 달성하기 위해선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 있다. 그건 바로 ‘연대’다.
‘캐스트 어웨이’ 속 톰 행크스처럼 혼자만의 힘으로 각자도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천재지변과 같이 맞닥뜨린 재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재난을 맞이한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재난에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를 통해 재난을 극복하는 것이 ‘부산행’과 ‘워킹 데드’처럼 중요하단 점을 ‘스위트홈’은 강조하고 있다.
‘스위트홈’에서 이진욱이 연기하는 살인청부업자 편상욱은 ‘워킹 데드’에서 노먼 리더스가 연기하는 대릴처럼 처음엔 연대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아웃사이더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든든한 연대자로 자리한단 점에서 편상욱과 대릴은 맥락을 같이 하는 캐릭터다.
그런데 ‘스위트홈’이 ‘부산행’, ‘워킹 데드’와 데칼코마니처럼 같다고만 볼 순 없는 드라마다. 그 차이점은 드라마 속에서 공존의 대상이 꼭 인간이 아니란 점에 있어서의 차이점이다.
‘부산행’의 공유, ‘워킹 데드’의 앤드류 링컨이나 노먼 리더스가 생존을 위해 연대를 맺는 대상은 같은 종인 사람이지 감염자가 아니다. 좀비는 척살하거나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대상이다.
하지만 ‘스위트홈’은 다르다. 공존 가능한 대상이 꼭 인간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걸 넷플릭스 시청자들에게 은연중에 설파하고 있다.
극 중 최고가 연기하는 김영수가 괴물을 향해 “내 친구야, 날 도와줬어”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비록 인간이 괴물을 무서워하지만 인간을 돕는 착한 괴물도 있고, 착한 괴물은 제거 대상이 아니란 걸 보여주고 있다.
아파트 입주민 중 한 명의 육신이 흑화(黒化)해도 오빠가 괴물을 공격하는 걸 막아서는 이은유(고민시 분)의 태도와,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견지하길 바라는 다른 입주민의 인간미 넘치는 포옹이 ‘스위트홈’ 안에 담겨 있다는 점에서 ‘스위트홈’은 ‘부산행’ 및 ‘워킹 데드’와는 결을 달리 한다.
이를 ‘엑스맨’ 시리즈와 비견하면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가 인간과 공존할 수 있는가, 아님 서로가 대적할 대상인가를 묻는 프로페서 엑스와 매그니토의 관점 가운데서 ‘스위트홈’은 전자의 관점인 프로페서 엑스의 마인드와 유사점을 갖는다.
괴물보다 더 잔인한 건 같은 종인 사람일 수 있다는 걸 9화부터 보여주는 ‘스위트홈’은, 공존 가능한 대상이 반드시 인간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단 걸 보여준다는 점에 있어서 ‘엑스맨’ 시리즈의 프로페서 엑스가 강조하는 마인드와 맥락을 같이 한다.
미디어스 (사진: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