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방법으로 시작한 이야기
2016년 9월 16일
이 시기의 나는 지독한 우울을 겪고 있었다.(코멘트 by 2019.10.)
밥을 먹고 교정을 걸으며 수업을 듣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자는 일련의 일과 속에서 나는 지나가는 생면 부지의 타인을 제외하면 언제나 혼자였다. 쇼핑이나 산책, 독서와 같이 혼자서 누리던 즐거움이 끝내는 지저분하게 늘어지는 우울증세가 되어 돌아오는 것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때 처음으로 외로움이 사람을 좀먹을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개강을 하고 굳게 다듬었던 의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모습을 감추면 남은 것은 집에 돌아와 천장을 향해 몸을 뉘는 무기력함뿐이었고 어떤 때는 그조차 힘들어 숨만 쉬는 식물인간이기를 자처했다. 수업이 없는 어느 날은 베짱이마냥 오후 느지막히 일어나 숨만 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집안 전체의 통풍을 담당하고 있는 창문 하나와 벽에 답답하리만치 붙어있는 침구, 그리고 서서도 한 눈에 들어오는 방 안의 가재도구들이 언제나처럼 제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나 같았다.
학기 중 두 번의 시험기간이 유일한 삶의 변주였다. 이 때는 알바도 하지 않아서 하루에 입을 여는 일은 혼잣말을 하거나 가끔 마주치는 동기들에게 인사를 건넬 때가 아니면 거의 없었다. 청춘의 특권이라는 사랑을 하면 소스라치도록 낯선 이 감각도 조금은 가시지 않을까 싶어 세상 밖으로 눈을 돌려보기도 했지만 절절한 외로움 속에서는 타인은커녕 나 자신조차 사랑하기 어려웠다.
탈출구로서의 글(코멘트 by 2019.10.)
몇 번의 방학을 보내고서 또 하나 깨닫게 된 사실은 외로움은 익숙해질 수는 있어도 무뎌지기는 힘든 감각이라는 것이었다. 대신 나는 그것을 글로 적어보기 시작했다. 내 안에 뿌리 내린 고독을 문자 속에 담아 바깥으로 뽑아냈다. 속에서 곪아 문드러질 때까지 지니고 있느니 그 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여기서 나는 의외의 효험을 발견했다. 그 동안 처방했던 수많은 임시 방편들보다도 훨씬 효과적이었고 장기적인 효능을 발휘했다. 글은 모든 병의 만병통치약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지지대와 탈출구가 되어주었다. 언제까지일지는 몰라도 가능한 한 길고 오래 이야기를 적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된 것도 이 때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나는 외로움을 그려내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