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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둘이 저녁을 먹었다는 사실만으로 야근이 즐거웠다면

감정의 단순성

by 휴지


사람이란 얼마나 감정이란 호르몬 집합체의 노예이며,

감정이란 또 얼마나 단순한 비실체인가.


지난 주, 친한 동기와 저녁을 먹고 회사로 복귀하는 길에 함께 야근하는 팀원과 그 친구를 상정에 두고 자그마치 8천원어치 붕어빵을 한 아름 사왔다.

그리고는 슬쩍 단톡방에 붕어빵 먹을 이를 구인하며 그 친구와의 우연같은 만남을 주도했는데, 당시 짧게 나누었던 대화가 계기가 되어 오늘은 단둘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아침에 탕비실에 커피를 내리러 간다던가, 물건을 전달해주러 갈 때 이외에 단둘이 무언가를 하는 건 사실상 처음이었다보니 설레면서도 한편으론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그룹 속에서 만나던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조금 더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이길 기대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부디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길.


적어도 나는 평소에 못 다했던 이야기를 많이 꺼내 늘어놓았다. 작년에 힘들었던 이야기, 팀 분위기와 업무량, 회식 때문에 힘들었던 몇 가지 사건들. 그런 얘기를 하면서 나의 파편을 보여주었고 상대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을 은연중에 요구했는데 다행히 부담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지는 않다. 이 또한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길.


작년과 올해 너무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느라 고생하는 모습을 알아주고,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궁금해하고, 물어보고,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는 걸 겪어본 당사자로서 너무 잘 아니까. 그렇게 해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 힘듦을 나만이 공감해줄 수 있을거란 약간의 우월감과 뿌듯함에 취해 즐거웠다. 누구는 힘들다고 끙끙대는데 그걸 보며 좋아하다니 참 얄궂은 마음이다.


그러다 주간에 단톡방에서 오르내렸던 대화가 언급이 됐다. 자기는 모르는 나와 다른 동기의 대화를 궁금해하며 그게 뭐냐고 물어오는 속을 알고 싶으면서도 내 멋대로 해석하는게 즐거워 복잡한 속임수 없이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그러면서도 의도치 않게 일종의 밀당같은 모양새가 되어 좀 민망하기도 했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아무 눈치를 못 챈 척하며 잘 수습할밖에.


그 밖에도 그 애는 나에게 사소하면서도 정작 콕 짚어 묻기는 애매한 질문들을 했고, 나는 흔쾌히 대답하며 즐거웠다. 그러면서 생각보다 우리가 서로 나눈 것들이 많은 듯한 기분이 들어 묘하기도 했다. 서로를 그냥 친구, 친한 무리 중 하나로 인식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보다는 조금 더 발전된 사이가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저녁을 먹은 뒤 편의점에 들려 나와 그 친구가 공통으로 좋아하는 제로콜라를 사는데, 자연스럽게 2개를 들고 와 바코드를 찍길래 나 역시 자연스럽게 카드를 꺼냈다. 그런 나를 보며 “잘 먹을게” 라고 말하는 그가 좀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애초에 사줄 생각이긴 했는데 그걸 굳이 언급하며 짚는 모습이 참 그답다 싶어서. 씨빨 당연이 사주지


당장 그제만 해도 나는 이 친구가 소속된 어떤 무리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로 머리를 싸매며 밤잠을 설쳤는데, 오늘 이렇게 1시간의 일대일 대면으로 그 고민을 깨끗하게 씻어냈다는 사실이 참으로 얄궂고 덧없다.

이렇게나 단순한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며, 그런 이상 감정의 휘하에서 벗어날 도리는 없다. 그렇다면 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최대한 즐기고 소화하는 것도 살아가는 방법이지 않을까.


여담으로 결제를 하고 돌아나오는 길에 지난 주 발렌타인의 여파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매대를 스쳐갔다. 만약 애인이 요런 실속없고 크기만 한 거대 츄파춥스 막대를 주면 어떨 것 같냐는 물음에 나도 모르게 “짜증날 것 같다“고 대답하지만 않았어도 조금 더 후회없는 저녁 시간이 되었을 것 같은데 이 또한 이미 엎질러진 물.


돌아오는 길에 내가 왜 그랬을까 골똘히 고민해봤다. 내 성격상 친구든 애인이든 누가 줬어도 줬다는데 의의를 뒀으면 뒀지 싫어하진 않았을 거다. 다만 그 뒤엔 이걸 누구한테 떠넘겨(난 사탕을 안좋아한다) 없앨지 후처리를 고민하긴 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 찰나에 어떠한 계산을 마치고 내 속을 내보이며 이 또한 받아들여주길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본능적인 반응이자 나의 숨길 수 없는 본색이 드러나고 만 거다.


사람은 이렇게나 감정적이다.

오늘 내가 감정의 널뛰기를 수십 번 겪었던 것처럼 상대 또한 나로 인해 그러하기를 바라는 심경조차 지극히 감정적이다.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한 이러한 변수가 삶을 더욱 다채롭게 만드므로, 좀더 즐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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