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집으로 가신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난 지금,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쩌면 어머님은 생계를 위한 고민을 많이 하신듯했는데 생각만 하며 아이디어만 이야기하셨던 어머님이 드디어 일을 내신 것 같았다.
본국으로 가신 이유 중에 첫 번째 이유는 장애가 있는 시누이를 혼자 둘 수없어 우즈베키스탄으로 가기를 결정하신 어머님이시지만 누구보다 아끼는 아들이자 나의 남편, 샤로프든과 나머지 가족에게 짐이 되기는 싫으신 눈치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빈자리를 메우기 위함인지 든든한 가장이 되려는 듯 어머님은 곧바로 사업을 시작하셨는데 사업 아이템은 바로 우즈베키스탄의 주식인 빵이었다.
남편과 연애할 때부터 서울에 있는 웬만한 우즈벡 식당을 이곳저곳 많이 다녀본 나로서는 어머님의 음식 솜씨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고 한국음식도 몇 번 먹으면 얼추 비슷하게 만들어 내시는 어머님을 보며 식당을 하면 잘하겠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또 요리만큼은 열정이 남다르셨기에 어머님만의 요리 레시피를 가지고 계시면서 음식사업을 꿈꾸셨던 어머님은 한국에서 아이를 봐주시면서 틈틈이 인터넷으로 주방 기계들을 보며 중고 가격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가져갈 방법에 대해 고민하셨던 어머님이셨다.
그런 어머님께서 우즈벡으로 가시자마자 수도인 타슈켄트로 가셨고 어머님만큼이나 요리 솜씨가 좋으시고 현지 사정을 잘 알고 계신 막내 이모님과 함께 사려고 벼루셨던 반죽기계를 찾아 돌아다니며 열심히 시장조사를 하셨던 모양이다.
시장조사에 이어 좋은 식재료를 파는 타슈켄트의 가게와도 계약하고,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팔 수 있는 서류까지 모두 허가를 받으셨다고 하신다.
어머님이 만드시려는 빵인 파트르는 우즈베키스탄의 주식이면서 결혼식이나 행사에서도 많이 쓰이는데 시장조사를 한 결과 타슈켄트에는 있지만 어머님이 살고 계신 시댁에는 아직 기계를 들여 크게 하는 사람은 없었고, 맛에 비해 타슈켄트는 비쌌고 시댁 동네는 저렴한 대신 비위생적이거나 마진을 많이 남기려고 재료를 아끼기에 ,부족한 맛이 난다고 하셨다.
어머님은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 마진을 조금 남기더라도 우리에게 해주셨던 그대로 재료 하나 아끼지 않으시며 만드셨고 빵의 가격은 보통 5000숨에서 25000 숨, (한국돈으로600원~2800원 )인데 가성비를 갖추려고 노력하신 것 같았다,
[집에서 파트르 만드는 과정]
어머님께선 아버님이 남기신 유산으로 나름 큰 투자를 하신듯하다.(이 정도 장비면 남편이 있는 동네에선 최첨단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파트르는 빵을 얇게 여러겹 겹쳐서 페스츄리와 비슷하게 씹는 맛이 있고 고소하다. 보통 국물요리에 찍어 먹는 빵인데 생크림에 찍어먹어도 맛있고 결혼식이나 행사에 쓰는 파트르의 경우는 크게 만들기 때문에 크기에 따라서도 가격차이가 난다.
평소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마당발인 막내 이모님의 영업으로 시장과 가게 등 많은 곳에 보내 팔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 다음 주부터는 다른 지역에 가져가서 판매해보신다고 했다.
바로바로 만드는 수제 빵이다 보니 하루에 만들 수 있는 양의 한계가 있었는데, 현재 하루에 100개 정도 만들어 팔 수 있었고 이것도 보통 아침에 예약이 되어 있어 새벽 두 시에 일어나서 만드신다고 하셨다. 어머님의 빵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소문이라도 낫는지 상인들이 서로 사가겠다며 다투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어머님은 요즘 몸은 힘들어도 우즈벡 생활에 생기가 넘쳐 보이셨다.
사실 육아와 살림하는 어머님을 보면서 바깥일도 뭘 해도 잘하실 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과묵하시고 대범하신 어머님답게 이런 실행력에 감탄했다.
생전에 화 한번 내시지 않고 차분하신 아버님 모습을 보고 며느리로서 왜 그렇게 부족했나 후회도 되면서 훈계로 얻은 교훈이 아니어서 그런지 아버님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어머님을 보니 하루하루를 힘든 내색하지 않으시고 씩씩하게 살아가시는 모습에 존경스러웠고 시작은 미흡하지만 나도 어머님처럼 실행력 있게 무언가를 해나가야겠다는 다짐을 또 한 번 하게 되었다. 혼자 계신 어머님이 걱정이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영상통화를 하고 있는 남편이지만 어머님이 잘 지내 시는 모습에 남편도 남편을 보는 나도 안심이 되었다.
네살 아이를 키우며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라 몸도 쉽게 지치고 피로가 금방 쌓이는 요즘, 남편도 휴직하며 앞으로의 생활을 어떻게 해쳐나갈지 무엇을 할지 깊은 고민을 하는듯해 보였는데
나또한 우리 가족이 앞으로 어디에서 살고 있으며 어떻게 육아를 해나갈까 이런저런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있다. 그리고 한국사람이라는 이유로 시댁에서는 나에 대한 관심과 기대감이라고 해야 할까, 혼자만의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그런 느낌을 받는 나이다.
그래서인지 언젠가 부자가 돼서 우즈베키스탄의 한국 며느리 최고라는 소리를 듣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는데 이제는 한국인 며느리 덕이 아니라 어머님 덕분에 사모님이 되는 건 아닌지 남편 몰래 김칫국도 마시는 중이다.
우즈베키스탄 며느리들은 새벽에 집 앞마당을 쓴다는 소문이 있는데 언젠가 나도 마당을 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행복한 상상과 함께.
어머님의 사업이 대박나길 바래본다. (지금도 모든게 감사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