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출산 이야기
우스갯소리로 김태희가 밭을 간다는 우즈베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남자와 결혼하면 2세는 누구를 더 닮을까?
첫 번째도 건강 두 번째도 건강.
건강하게만 태어나길 바라는 엄마지만 이왕이면 엄마 아빠의 좋은 유전자만을 받아 예쁜 딸아이가 나와주길 바라는 중 길다면 긴 10개월의 여정을 거치고 둘째 딸아이가 우리 곁으로 왔다.
나의 두 번째 출산일기
출산예정일보다 일주일 빠른 날로 우리는 유도분만 날짜를 잡았다.
단백뇨로 임신중독의 위험으로 갈 수 있다는 담당 선생님의 말도 있었고 무엇보다 담당 선생님이 계실 때 출산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는 병원은 여자 선생님이 딱 한 분뿐이신데 종교적인 이유인지 문화 차이인지 남편은 무조건 여자 선생님만을 고집하였는데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나 또한 내 상태를 제일 잘 아는 담당 선생님께서 봐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데 유도분만에 대한 불안한 마음에 인터넷 검색과 지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을 하다 남편에게 말하니 남편은 아기 낳는 사람이 당신이니 유도분만이 싫으면 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남편이었다. 이날 유도분만을 왠지 하면 안 될 것 같은 알 수 없는 기분에 결국 당일날 나는 변덕스럽게도 병원에 전화해서 취소를 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빠르게 흘러 출산예정일이 지나면서 초조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때, 이슬이 비췄고 이제 정말 출산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생각에 두려움 반 기쁨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은 예정일도 지났으니 병원에 가보자고 했고 병원에 가면 왠지 바로 아기를 낳자고 할까 봐 겁이 났지만 더 이상 미루면 안 될 것 같아 병원 진료만 받고 돌아오자는 생각으로 병원으로 향했다.
나 오늘은 아기 안 낳을 거야. 아직 최후의 만찬도 즐기지 못했어!
진통이 오면 아기를 낳을 거라 신신당부를 하며 병원에 가는데 이전과는 다른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대기표를 뽑고 앉아 기다리며 남편에게 사람 많으니 그냥 가자고 보채는 와중에 어느새 내 차례가 되어 접수처에 갔고 이슬이 비췄다는 이야기를 하니 대기도 없이 3층으로 당장 올라가라는 이야기를 했다.
3층으로 가라니.
첫째도 이곳에 낳아서 나는 3층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지옥의 문 같은 곳. 분만실이 그곳에 있었다.
병원에 온 것이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지만 안 낳을 것도 아니고 돌이킬 수도 없겠다는 생각에 빠른 체념 후 나는 3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곧바로 옷을 갈아입었고 어느 순간 담당 선생님이 올라오시면서 내진을 시작하였다.
아기가 아직 나올 생각은 안 하는데 내진을 해버려서 이미 피가 많이 나고 있었고 담당의사 선생님께서는 이대로 집에 가는 건 무리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뷔페 가서 잔뜩 밥이라도 먹고 올걸. 최후의 만찬도 즐기지 못했는데.
뷔페를 못 간 게 더 억울했다.
친정엄마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큰딸을 맞기고 나는 촉진제와 무통주사를 맞은 뒤 남편과 나는 분만실에서 함께 아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첫째를 낳을 때는 병원에 도착해서 여섯 시간 정도 진통 끝에 아이를 낳았고 첫째 때 큰 어려움 없이 출산을 한 기억이 있어 사실 둘째를 낳는 것도 큰 어려움이 없겠거니 생각했는데
여러 번 내진을 했지만 자궁문은 2센티밖에 열려있지 않았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진 탓에 진통이 빨리 오기 시작했다. 관장과 내진 촉진제와 무통주사까지 모두 맞고 분만실에 누워있는데,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미친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힘든 모습을 남편에게 다 보이기는 싫었는지 괜찮냐고 묻는 남편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하던 나였는데 5분 10분 시간이 지날수록 1분 1초가 안 가는듯했다.
괜찮다는 내 말을 백 프로 믿었는지 남편은 옆에서 핸드폰을 보여주며 뜬금없이 나에게 퀴즈를 내기 시작했다. 긴장을 풀라고 나에게 퀴즈를 냈다고 하는데 그때는 눈치 없는 남편이 너무도 미웠다.
자기 미안한데 나가주면 안 돼?
왜 많이 아파? 그냥 여기 있을게. 아프면 누구 불러야 되잖아.
아니야 혼자 있고 싶어.
괜찮아. 같이 있어야지.
제발 나가!!
진통을 느끼면서 옆에 누군가 있는 게 신경이 쓰였던 건지 혼자 있으면서 진통이 올 때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리를 꽥하고 지르고 싶었다.
첫째 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덜 아플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번에 아기를 낳으면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산모마다 진통이 달라서 산모가 아프다고 꽥꽥 소리 지르지 않는 이상 간호사들은 달려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아프다고 무통주사를 넣어달라고 애원하는 내 모습을 보고 그제야 간호사들이 우르르 달려왔고 간호사들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숨참으셔야 돼요!
힘 더 주세요!
숨셔야 돼요!
산모님 눈뜨세요!
너무 힘들었지만 자궁이 열리기까지 진통을 홀로 느끼는 시간보다 간호사들이 위에 올라가서 배를 누르고 도와줄 때 고지가 보인다는 생각에 오히려 안 아팠던 것 같다.
그리고 너무 행복했던 한마디
다 됐어요! 선생님 모셔오세요!
아기가 다 내려왔다고 선생님을 모시러 나간단다.
선생님이 오시고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최선을 다해 힘을 주었고 촉진제를 넣고 다섯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렇게 둘째를 출산하였다.
아기가 나올 때쯤 남편이 들어왔고 남편은 둘째의 탯줄을 잘라 주었다.
싹둑싹둑 참 잘도 자르는 남편이다.
여러 감정들이 벅차올라 아기의 울음소리와 함께 나도 눈물이 흘렀고 그런 눈물을 남편이 닦아주며 수고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잠시 분만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남편이 아이 사진을 찍어와 나에게 보여주었다.
동영상은 찍으면 안 되나 봐. 사진밖에 못 찍었어.
사진을 보고 나는 아주 잠시 실망을 하였던 것 같다. 내심 남편을 많이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90프로는 나를 닮은듯했다. 제길, 한국인 유전자가 쌘 걸까 우리 집 유전자가 쌘 걸까.
외할머니와 이모들 엄마 그리고 나까지 쌍둥이처럼 닮은 우리 외가댁의 유전자를 우리 둘째 딸이 그대로 물려받은듯했다.
역시 우리 외가 쪽 유전자는 절대 강자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샤로프든 은 귀엽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쌍꺼풀이 실종됐다는 말에 비수가 콕하고 꽂히는듯했다.
시댁과 영상통화를 하면서도 시어머님과 시댁 식구들도 너무나 한국인의 얼굴인 딸아이를 보고 예쁘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놀라는 눈치였다.
출산 후라 예민해졌는지 남편과 차이나는 외모 콤플렉스 때문인지 기분이 언짢아진 나였고 남편은 금방 눈치라도 챘는지 우즈베크 동네에서 벌써 둘째 딸을 탐내는 사람들이 있다며 우즈베크 가면 아주 인기가 많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어쨌든 결혼 4년 차에 우리는 둘에서 건강한 두 딸이 생겨 네 가족이 되었고
입원한 3일간 남편과 미래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무사히 출산 후 집으로 돌아갔다.
셋째를 낳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