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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in Mar 13. 2021

우즈베크 남자가 살림을 한다고?

우즈베크 남편과 함께하는 전투 육아

우즈베크 남자가 살림을 한다고?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빨리 이혼해라. 불쌍하다.

맞고 살지나 말아라.


그리고

그중 가장 나를 충격에 빠뜨린 말은

밑이 없는 남자가 아니냐는 말이었다.


이런 사고방식이니 남자가 집안일을 안 할 수밖에!!!!!

라고 똑같이 욕하고 싶었지만 소심한 나는 조용히 댓글을 지울 뿐이었다.




첫째는 시어머님과 함께 살면서 어머님이 전적으로 봐주셨기에 별 탈 없었지만, 둘째는 낳기 전부터 모든 게 두려웠다.  

불안 불안한 나에게 맞기는 것보다 마음 편히 본인이 다 해치우려 하는 어머님과 늘 함께여서 어머님의 부재가 더욱이 나를 두렵게 했는데 어느새 시간은 가고 못할 것 같던 육아도 어느덧 둘째가 백일이 되었다.


하나도 아니고 이제는 둘이나 된 내 아이들.

아프지 않고 잘 커준 것에 아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덜렁거리고 불안하긴 하지만 나에 대한 대견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이 영광을 나는 남편 샤로프든과 함께하고 싶다.



얼마 전, 둘째의 백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5인 이상 집합 금지에 첫째 아이와 백인 된 아이를 데리고 사진관에 가는 것조차 겁이나 결국 집에서 우리끼리 간소하게 파티를 하게 되었다.


자기 아기 100일은 그냥 케이크만 사고 우리끼리 집에서 사진 찍자.

그래 그렇게 해. 근데 소라는 케이크 못 먹는데 왜 소라한테 케이크를 사주는 거야?

파티니까 케이크는 있어야지.


아이 생일까지는 그렇다 쳐도 50일 100일은 왜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첫째 때도 그렇고 아이를 키우는 방식에 있어서 또 한국생활 중인 우즈베크 남편이기에 항상 내 의견에 따라와 주는 남편이다.


육아를 함에 있어 지금 가장 힘든 것이 있다면,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나만의 시간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점점 나를 잃어버리는 기분이 든다는 것인데

나를 위한 시간을 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그 시간만큼 놀아달라는 아이들의 말을 뿌리치거나, 아이들은 티브이를 보게 하는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내어 죄책감을 가질 바엔 새벽시간을 이용하자는 생각도 했는데 이 또한 다음날 아침에 잠이 오지 않게 하기 위해 밥을 굶는 의지를 보여야만 가능했다.


이런 내가 남편에게 원망 한번 못하는 것이

코를 골며 깊게 자는 나와는 달리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깨는 남편인지라 새벽엔 그래도 남편이 우유도 먹이고 잠도 재우고 둘째를 봐주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나만의 시간이 사라지고 있어서일까 하고 싶은 건 왜 점점 많아지는지 그럴 때마다 우울감이 쌓여가면 한 번씩 남편에게 분노하며 이야기할 때도 있었다.


나 제주도 갔다 올게. 혼자서 바람 쐬고 올 거야. 우울증 걸리겠어.

갔다 와~


안된다고 말하면 아마 제주도를 이미 갔다 오고도 남았을 테지만 남들이 말하는 우즈베크 남자와는 많이 다른듯해 나의 일탈 욕구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우즈베크 와이프가 아닌 한국 와이프라 그런 건지.

나를 잘 알아서 그런 건지.

아내가 없는 게 더 편한 우즈베크 남편인 걸까.

씁쓸하기도 했다.


전투 육아를 하며 아이들을 위해 좀 더 열정적으로 하루를 보내면 다음날은 늦잠을 자기도 했는데 아침마다 나는 오히려 조용함에 잠에서 깼고, 일어나서 거실에 나가보면 둘째는 거실에서 자고 있고 역시나 남편은 본인 할 일을 하고  큰애는 티브이를 틀어주고 있었다.

티브이를 보여주는 건 시력이 좋지 않은 나로서 아이에게 정말 힘들 때 한 번씩 틀어주는 유일한 나의 쉬는 시간인데 그렇게 남발하는 남편이 가끔 얄밉기도 했다.


남편과 육아와 살림을 분담하며 두 아이를 지지고 볶고 키우면서 샤로프든의 육아에 있어 장단점도 찾을 수 있었다.

샤로프든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어느 유치원을 보내야 하는지 무엇을 지금 가르쳐야 하는지 이런 교육적인 부분에 있어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다.

시어머님이 가시고 집에서는 한국어만 쓰고 있어서 아이도 우즈베크어를 곧잘 했던 아이가 이제는 1,2,3,4 도 잊어버렸으니.


남편에게 책 좀 읽어주라고 하면  몇 장 읽어 넘기다가 아이를 흔들어주며 어느새 둘이 놀고 있었다.

큰애는 다섯 살이나 됐는데 아직까지 유치원도 다니지 않아 집에서 책도 읽어주고 한글 공부도 하면서 열심히 홈스쿨링을 하겠다는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남편은 교육적인 부분에 있어 너무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좋은 점은 이런 일들을 엄마에게 일임하는 대신 그 어떤 잔소리나 훈수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인군자처럼 항상 긍정적이고 좋은 모습만 보이셨던 시아버님도 샤로프든이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아버님께 혼났던 적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늘 훈육과 잔소리는 시어머님이 담당이었다고 했다.


예전엔 남편이 아이에게 훈육을 하면 나는 그만하라고 아이 앞에서 남편에게 화를 내기도 했는데 그러고 나니 이후에 남편이 화를 내면 아이는 나에게 달려와 아빠가 화낸다고 나에게 일러바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샤로프든은 육아에 지쳐 큰애에게 짜증 섞인 잔소리를 할 때에도  아무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하라고 아이에게 가르쳤다.

그래서인지 아이에게 혼내면서도 별로 혼낼 일이 아니었는데 혼낸 것에 대해 마음이 더 아파왔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남편의 이런 모습에 아빠가 아이에게 훈육을 할 때는 아이의 편이 되어주지 않고 그 어떤 이유라도 아빠의 말씀이 맞다고 말하는 내가 되었다.




우즈베크 남자라고 하면 고지식하고 집안일을 전혀 하지 않을 거란 사람들의 인식이 있는듯한데 우즈베크 남자와 살아본 나로선 우즈베크 여자들이 살림 잘하고 아이들을 잘 봐서일까 그걸 보고 자란 우즈베크 남편이라 육아도 하면 더 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샤로프든도 처음부터 육아와 살림에 관심을 두진 않았었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첫째 때는 시어머님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 보니 남편이 더 육아나 살림에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어머님이 가실 때 걱정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시어머님이 없는 지금의 남편은  새벽에는 나와 교대하며 둘째를 봐주고 화장실 청소도 분리수거도 저녁도 남편 담당이 되었다.

우즈베크 남자가 집안일을 안 한다는 것이 어쩌면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가족 구성원에 딸이나 며느리 시어머니를 포함한 여자가 많다 보니 살림보다는 집에 문제가 있을 때 수리를 하거나 집에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하는 게 전부였던 것 같다.

지난번 우즈베크에 있을 때도 우즈베크에서 잔치를 할 때, 마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밥을 먹을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여자들은 음식을 하고 있으면 남자들은 무거운 상을 펴고 음식을 나르는.  남자들 또한 분명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우즈베크 남자와 살면서 많은 것을 우리는 서로에게 배우는 중인 것 같다. 

엄마와 누나가 하는 걸 봤다며 앉아서 두 다리를 쫙 펴고 베개를 올려 아이를 눕히고 옆으로 흔들어 아기를 재우는 남편, 너무도 잘 자는 아이를 보고 나는 우스갯소리로 남편이 외출하면 다리는 두고 나가라고 이야기한다.

아기가 분수토를 해서 코와 입으로 들어가고 다급한 상황에서 나는 무언가 대처법을 찾기보단 일초도 안 되는 시간에 나는 남편을 찾아 달려가면 남편은 당황하지 않고 아기를 옆으로 돌려눞여 등을 치는 샤로프든이다.

그리고 샤로프든이 못 푸는 육아문제는 곧바로 시어머님께 sos를 친다.


어설픈 엄마와 육아를 못할 것 같은 우즈베크 아빠.

그렇게 우리는 병원 한번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두 아이를 키워나가고 있다.


가끔 육아나 나의 꿈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삶이 지친다고 느낄 때가 있다.

열심히는 사는 것 같은데 왜 이룬 게 없다고 느껴지지?

언젠가 남편에게 물은 적이 있다. 앞이 안 보이는 터널에 우리 가족이 덩그러니 있는 느낌이 드는데

샤로프든과 우리의 결혼 후 있었던 에피소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금세 우리는 아주 많은 것을 얻었고 정말 잘살았다고 느껴졌다. 정말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우리가 마음껏 못질과 아이들이 낙서할 수 있는 두 채의 집도, 아이를 태우고 다닐 수 있는 자동차도, 무엇보다 예쁜 두 딸들을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뤄냈으니 말이다.(물론 부모님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내 시간이 없어지고 결혼 전 혼자일 때,  솔로일 때의 나를 회상할 때면 그 많던 시간이 참 그립기도 하지만, 위기에 처하거나 슬픈 일이 생겼을 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온전히 진심으로 슬픔과 축하를 함께해주는 적어도 완전한 내편이 하나 생긴 지금이 나는 훨씬 더 만족스럽고 감사하다.

늘 지금처럼 아프지 않고 함께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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