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간 딱히 어딘가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우즈베크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차로 열 시간 떨어져 있는 이곳 시댁이 있는 마을엔 많은 가족들이 함께 살고 있어 매일매일이 이벤트이고 특별한 날들이 계속되었고, 나는 이곳에서 시댁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예뻐해 주는 시댁 어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감사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렇듯 화목한 생활 속에서도 문제는 부모님과 함께 살다 보니 부부싸움을 들키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철없이 사소한 일들로 싸우는 우리 부부에 중간에 있는 시누이와 어머님만 늘 고래싸움에 새우등만 터지고 있었다.
변해버린 생활환경에 우즈베크에 간지 얼마 안 되어 우리가 싸웠던 이유는 다름 아닌 남편의 말투.
한국에서는 친구가 많이 없고 가족도 없어 늘 가족과 시간을 함께 하는 남편이었지만 우즈베크에 오니 하루가 멀다 하고 큰집 형이 부르고 사촌동생이 부르고 오늘은 삼촌이 불러 남편은 남자들과 우르르 몰려나가 수영장에 가거나 고기를 먹으러 가거나 하는 등, 샤로프든의 외출에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남편의 말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타지 생활에 답답함을 느꼈던 나였지만 아이들을 돌봐야 하기에 집에서만 지냈던 나는 확 김에
나도 애들 두고 나가서 놀 거야, 라는 말을 했고 어차피 나가지 않는 걸 알면서 남편은 길도 모르면서 어디를 가냐는 식으로 말을 했다.
샤로프든은 내가 단순히 어디에 가고 싶어 그러는 줄 알았는지 후에 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어봤고
확 김에 아이들이랑 시간도 보내고 놀이공원도 가자고 이야기했는데 나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은 남편은 이모님이 편찮으셔서 집으로 의사까지 온 이때 택시 불렀으니 빨리 옷 갈아입으라고 나를 재촉했다.
가기 싫다고 했지만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결국 이날 놀이동산에 다녀왔는데 남편은 또다시 사촌들과 운동을 하러 나가버렸고, 다 이해했다고 말하면서 아내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라주는 샤로프든 은 나를 더 서운하게 했다.
시댁과 가까이 지내고 싶어도 점점 더 이상한 며느리가 되어가는 듯한 이 느낌.
이날 이후 나는 남편과 대화 없는 이틀의 시간을 보냈다.
부부싸움 후 혼자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처음엔 책을 들었지만 머릿속의 여러 잡생각 때문에 책은 읽히지 않았고 보지 않던 유튜브로 예능프로를 보며 누워서 과자도 먹고 그렇게 시간을 때우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어머님이 들어오셨고 어머님은 둘이 왜 싸우냐 물으시며 갑자기 나를 안고 펑펑 울으셨다.
하파볼듬 하파볼듬.(슬퍼하지 마 슬퍼하지 마.)
늘 강인해 보였던 시어머님이 우시는 모습을 보고 나는 망치도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앗! 내가 또 이곳에 와서 이기적인 실수를 하고 있었구나..
한국생활을 하고 있는 하나뿐인 아들이 오랜만에 우즈베크에 왔고 우리의 우즈베크 방문에 너무 반가워하시고 좋아하셨던 어머님이시기에 한국에서 온 며느리가 불편할까 봐 늘 내 눈치를 보시는 어머님이셨는데.
샤로프든과 말도 하지 않고 지내며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소리가 나올까 봐 그러셨는지 한없이 약해 보이는 어머님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 잘 지내보려 했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이런 어머니를 우리 부부싸움으로 슬피 울게 만들다니.
이날 우시는 어머님에게 아무렇지 않게 알겠다고만 말하고 얼른 그 자리를 피해 주방으로 도망쳤고, 도망친 곳에 숨어서 펑펑 울며 어머님에게 죄송한 마음과 함께 나를 항상 이해해주려는 어머님에게 말하고 싶었다.
샤로프든에게 서운했던것 모두.
하지만 언어의 장벽에 막혀 늘 그자리에서 멈추게되는 시어머니와 나의 사이였다.
사실 우즈베크에 오기 전 한국에서 나는 시댁생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였는데 늘 내게 넘치게 잘해주는 시댁이었지만 한국생활과는 다른 낯선 가족 세계(대가족이다 보니 동네에 살고 있는 식구들이 새벽이니 밤이니 찾아오는 것)와 타지에서 그것도 외국인 시댁 어른들과 지낸다는 것부터가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나 또한 이런 대가족과 함께 하는 것에 익숙해진 듯했고 무엇보다 막상 시댁에 들어오니 상전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넘치는 대접을 받고 있었는데, 우즈베크 음식 이런 거 맛있다고 툭 던진 이야기도 다 듣고 계셨던 어머님, 이모님, 시누이.
온 가족이 나서서 맛있음 음식과 빵을 만들어주셨고 빵가게에서 늦게까지 일하면서도 집에서 밥도 잘 못 챙겨 먹을까 싶어 샤로프든 의 사촌동생을 시켜 밥까지 집으로 매일같이 배달해주었다.
불편할 나를 위해 최대한 편하게 지내게 해주고 싶어 하는 시어머니와 식구들이었고 아이들을 두고 여기저기 여행 다니라는 이야기를 하시는 어머님은 아이들을 하루빨리 이곳 생활에 적응시키기 위해 빵가게에 데리고 출근하시려 하셨다. 또 침대에서 아이와 자면 불편할까 싶어 둘째가 잠이 들면 어머님은 방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서 재웠고, 책을 보고 컴퓨터를 하는 내게는 우즈베크에 온 첫날부터 책상을 구입해 들여놔주셨다. 그리고 얼마 전엔 잠깐이라도 편히 지내게 해주고 싶었는지 첫째 아이를 위해 침대까지 사 오셨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시어머니의 마음.
이런 시어머니와 가족들을 보면 잘해야지.
하면서도 샤로프든과 다투는 날엔 숨길 줄 모르는 내 표정은 그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는데 가끔 이럴 땐 시어머니가 내 남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어느새 하게 되었다.
직접구운 쌈싸(만두) / 가지맛을 알게해준 맛있는 가지요리와 쿠키
오쉬와 케익 그 밖에 손으로 빚은 만두
재봉틀 책상에서 컴퓨터를 하려했는데 책상을 사가지고 온 어머님
이토록 잘해주시는 시어머님이지만 나는 결혼하기 전부터 시어머니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강하게 박여있는 사람이어서 지금의 난 뼛속까지 박힌 고정관념과 현실 속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시어머니를 좋아하는 며느리가 세상에 있을까?
장남도 아닌 넷째 아들인 아버지와 넷째 며느리임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와 한평생을 산 엄마였고 40년 가까이 시집살이를 하며 손주를 예뻐하지 않았던 할머니여서 할머니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란 것도 있었지만, 매일같이 엄마에게 나가라고 소리 지르던 할머니를 보고 자란 나였다. 그런 할머니를 두고 매일같이 부부싸움을 하고 산 부모님을 보면서 나는 절대로 시집살이를 하면서 엄마처럼 바보 같은 인생을 살지 않겠다고 어렸을 때부터 마음속에 항상 독을 품고 산 것 같다. 이런 나였기에 외국인 남편과 결혼하는 것도 멀리 있는 시댁이 너무 좋았고 그래서 외국인이었던 남편이 더 좋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만난 시댁은 늘 내게 따뜻했다. 그럼에도 나도 모르게 시어머니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가슴속 깊게 자리 잡혀있어 시어머니에 대한 편견은 늘 나를 쫓아다녔고 어머님이 아무리 잘해줘도 뒤에 무언가 있을 거라는 의심들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시어머니와 한국에서 생활할 때도 용돈 한번 받지 않고 첫째를 네 살까지 키워주신 어머님이셨지만 깊이 박혀있는 고정관념에 부딪쳐 어머님에게 잘해드리다가도 어머님이 불편해지고 싫어져 남편과 다투고 그런 날들이 많았다.
나는 늘 사람들에게 도움받는 걸 싫어했고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 또한 무색했는데 이런 내가 밥도 살림도 육아도 잘 못해 늘 무엇이든 잘하는 어머님이 먼저 나서서 도와주셨고 그 때문인지 어머님에게 감사한 마음보다 도움을 받기 싫은데 자꾸만 받게 되는 게 미안해져 그런 핑계로 어머님을 더 멀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어머니에 대한 나의 나쁜 자아는 도움을 받는 것이 늘 감사한 마음보다 죄송한 마음, 불편한 마음이 들어 시댁생활에 부족한 만큼 더 잘해봐야지 결심하기도 했는데 그럴수록 더 부지런하게 잘해주는 시어머니였다.
어머님이 특별히 좋은 분이신 걸까?
아니면 내가 외국에서 온 며느리라서?
넘치게 좋은 분이 우리 시어머니지만 어머님에 대한 마음은 늘 복잡하고 어렵기만 하다.
이제는 어머님에 대한 마음을 의심하지 않고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하게 받고 싶은데.
유튜브에서 얼마 전에 박미선 씨가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모습을 보고 친정부모님처럼 편하고 서슴없이 지내며 털털해 보이는 모습에 부럽다가도 우리 시엄마도 저런 며느리를 만났더라면 좋았을걸,한국인 며느리가 다 저러진 않을 것인데 하며 내가 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 요즘이다.